사유의 유희 3선(選)
1
불가사의(不可思議)
공중파 방송의 한 군데서 송출하는 <알람브라 궁전의 추억>을 본방사수하고 하릴없이 빈둥거렸다. 그다음 먹잇감으로 EBS 일요 한국 영화 <아홉 살 인생>을 예약했는데 왜 그런지 감정이입이 되질 않는다. 둘째는 컨디션이 안 좋은가? 세탁기에 빨랫감이 가득 채워져 있는데 돌릴 생각을 안 하고 있다. 나도 왜 그런지 상쾌한 기분이 아닌 느낌이 일렁거리길래 따뜻한 물로 샤워를 했다. 촉촉한 물은 마음까지 온화하게 만드는 신비한 힘이 있다. 인간의 70%가 물로 구성되어 있다더니 인간은 정말 water친화적인 존재인 모양이다. 알콜친화적인 사람도 있긴 하지만 나는 water친화적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기분 전환된 나는 내친김에 설거지를 하고 이어서 세탁기에 중성세제와 섬유 유연제를 넣고 세탁을 명령한 후 거실로 돌아왔다. <아홉 살 인생>이 벌써 시작되고 있는데 좀처럼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
세탁이 완료되면 빨래를 꺼내어 건조대에 널어야 한다.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방금 생겨난 미션이 되었다. 미션은 항상 만들어지고 나를 조종한다. 미션을 수행하고 또 다른 미션이 생겨나고 그 미션을 또 수행하는 게 인생길이가 싶을 정도다. 이제 미션의 명령에 따르면 1시간 28분이 지나야 빨래가 종료된다. 그러므로 나는 시간을 죽이는 한가한 남자로 변신했다. 둘째는 밤늦게 바람 쐬러 가는지 외출을 하였는데, 갑자기 내버려졌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의 반려자식(캣) <만두>는 안방과 거실을 왓다리갔다리 하며 아웅~아웅~ 서운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다. 나의 마음에는 <만두>의 행동이 그렇게 읽힌다. 분명 <만두>와 둘째 사이에는 내가 끼어들 수 없는 끈끈한 애정라인이 형성되어 있었다.
빨래가 완료되면 꺼내어 말리는 미션을 부여잡고 그걸 기다리는 남자와 출타한 사람 엄마를 기다리는 냥이.. 나는 나의 의사와 관계없이 그런 공간 안에 놓여져 있게 되었다. 1시간 28분 동안... 이 시간은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도대체 의미라는 것 자체가 있기나 한 것일까. 나에게 있어서 인생은 영원한 불가사의다... 1시간 28분의 의미조차 알아낼 방도가 없다...
2
유희(遊戱)
언제부터인가 생긴 증상이 있다.
내가 직접 겪었던 경험들을 연도별로 나열하는 게 힘들어졌다. 분명 나의 삶은 미래의 어느 시점에 수렴하는 수열로 꾸준히 전진해왔을 것이다. 그런데 그 일들을 일렬로 이를 테면 시간대별, 연도별 순서대로 나열하는 게 매우 어려운 작업이 되어버린 것이다. 젊을 때 필름 끊어질 정도의 만취를 자주 하면 늙어서 치매가 올 수 있다고 하던데 그것이었나? 그래도 나는 40대 이후엔 술을 멀리하고 살았으니 조금은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 있을 텐데..
돌이켜보면, 인생을 살면서 정말 잘한 일 하나는 20대 초반에 담배를 끊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골초이셨는데 내가 담배를 끊을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어머니 덕분이겠지. 나는 체질적으로 담배를 받아들이지 못해 자연스럽게 담배를 끊을 수 있었다. 그런데.. 술은 시간이 많이 흐르고 나서 멀리하게 되었다.
이젠 여자만 멀리하면 된다.
나는.. 나의 삶을 반추하는 일조차 선명하게 해내지 못하게 되면서 글쓰기를 습관처럼 행했던 것 같다. 2009년부터 글을 쓰기 시작했으니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 글들이 많아지니 옛날에 썼던 글을 뒤적여 보면 "내가 이런 생각을 품었던 때가 있었나?" 그런 감흥을 느끼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글을 잘 썼던 적도 있었나?"
믿거나 말거나 그런 생각이 침범하는 때도 있다. 2017년 1월, 딸과 나의 관계를 글로써 묘사한 게 있었다. 블로그에서 다시 꺼내어 읽어 본다. 새삼스럽다. 거의 2년의 시차.. 그동안 나는 발전했는가 아니면 퇴보했는가.. 그런 궁금증이 인다. 기록으로 남겨 놓으니 이런 유희를 즐길 수도 있구나. 글쓰기를 참 잘했어.
결과적으로 나는 발전했던 퇴보했던 상관없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한 것은 2년 전보다 나는 둘째와 좀 더 가까워졌고 좀 더 허물없어졌다. 그것은 내 여자를 얻지 못했어도 아쉽지 않을 만큼 내 마음에 위무가 된다. 지금 나는 둘째를 향해 1mm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확신한다.
이건 정말 감사한 일이다....
3
평행이론(平行理論)
나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매일 넘어진다. 언제까지 전진할 수 있는지 장담할 수 없으면서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망으로 넘어지고 또 넘어진다. 원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지만 둘째에게 상처도 잘 준다. 둘째는 마음이 여려서 나에게 전화 걸어와 블라블라 시시콜콜한 얘기를 한다. 나는 시시콜콜한 얘기 하는 둘째에게 관대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꼭 지적질이다. 그런 얘기하려고 바쁜 시간에 전화한 거냐? 하지만 둘째에게는 결코 시시콜콜한 얘기가 아니었다.
둘째는 마음이 흔들릴 때 수다 떠는 대상이라도 되어주었으면 하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아버지이면서 마음이 강퍅하여 딸의 소박한 바람을 들어주지 못했다. 어쩌면 내가 치료받아야 할 마음을 가진 자였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말하기를 둘째가 기댈 언덕이 되어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가지고 있다. 말로만 그렇게 한다. 행동은 기댈 언덕이 아니라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거친 바람일 뿐이다. 나는 살다살다 지칠 때가 있고, 그런 마음이 전신을 휘감아오면 이젠 어떡하지? 두려워한다. 무늬만 아버지였을 뿐이었다.
다시 반복하지만 나는 욕심이 많아서 되고자 하는 것만 머리에 가득 차 있다.
그래서 둘째가 존재하는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소중한 것임을 망각한다. 둘째는 그런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하지만 그녀에겐 하나뿐인 아버지니까 일상의 사소한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반복한다. 욕심 많은 아버지는 자기 짝지 얻을 궁리질만 가득하다. 물리학을 모르는 내가 이론 물리학을 흉내 낸다. 둘째와 나의 궤적.
이거 평행이론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