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th Korea Story

제2장 Y시에서의 한철 / 3 - 리씽에서 만남을...

hittite23 2025. 4. 19.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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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여인

 

3

 

 

 

S시에서의 안착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던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K국 인기가수 조영남이 출연했던 체험 삶의 현장과 같은 여행지를 추천받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그 제안을 응하였다. OK 사인을 보내고 난 후 나는 정착촌 S시에서 자동차로 2시간 거리에 있는 D시 H철공소를 주말마다 오가는 현장 숙식 체험학습을 시작하게 되었다.

여행을 하다 보면 아무리 아름답고 멋진 풍광이라고 하여도 싫증을 느낄 때가 온다. 내가 그렇게 좋아하는 양고기 스테이크라 하더라도 하루 이틀이지 열흘이 지나면서부터는 소스와 향신료를 어떻게 조합하여 식탁에 대령시켜도 역하고 노릿한 냄새가 비강과 목구멍을 진동시키는 듯 공격해 오게 된다. 그럴 땐 어쩔 수 없이 비양심적인 한국인이 운영하는 값비싼 코리안 레스토랑을 찾아가서 미친 듯이 김치찌개를 흡입해야만 한다. 그와 같이 <K> 나라 여행이 매너리즘에 빠져든다 싶을 즈음, 마치 맛없고 성의 없이 차려진 밥상을 둘러엎는 난봉꾼처럼 나는 식상한 콘텐츠와 그저 그런 카테고리로 채워진 K 여행 스케줄을 망설임 없이 찢어 버렸다. 당신이라면 웜홀을 통과할 기회가 왔을 때 신세계로의 여행을 거부하거나 도망칠 용기가 있는가? 나는 그럴 용기를 갖지 못한 평범한 여행자였다.

 

하지만 체험 현장의 조건은 괜찮은 편이었다.

D시의 바닷가에 위치한 H철공소 인근에 거주할 수 있는 숙소를 제공해 주었고, 주말마다 베이스캠프인 S시를 왕래할 수 있도록 K모터의 중형차를 렌터 해줬다. 동글뱅이 4개 달린 승용차나 세 꼭지 별이 달린 승용차를 탈 수 있으면 좋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시절 <K> 나라는 수입 자동차에 산더미 같은 관세를 부과하고 있어서 나의 희망을 관철시킬 수 없었다. 그 외에 하루 세 끼의 식사는 체험 현장인 철공소에서 해결할 수 있었고 주 5일 체험 학습하는 날을 제외하면, 즉 주말이나 공휴일이면 S시를 왕래하든 또 다른 여행지로 자유여행하든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 있어 좋았다. 일종의 패키지와 자유여행이 버무려진 프로그램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완수하여야 할 주어진 과제를 마무리 지었을 때, <K> 나라 여행 경비를 충당하고도 남을 정도의 금액을 보너스로 지급받으니 꿩 먹고 알 먹는 1석2조의 계약이라고나 할까.. 정확하게 묘사하자면 패키지여행 + 자유여행 + 워킹홀리데이가 3위 일체 된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단점이 있다면 단지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몸을 학대할 정도의 어려움을 견뎌내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만 극복한다면 만사형통, 쿵따리 삐약인 체험학습이었다.

 

여행 제안이 들어오기 전, 그동안 여행을 통하여 습득한 정보에 의하면 지구별 인간들은 그렇게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운명을 타고났으니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조건이기도 했다. 왜 지구인들은 그들의 선조 아담과 이브가 그런 형벌을 자초하였다고 생각할까? 불현듯 그것이 알고 싶어졌다.

 

물론 나는 아담과 이브의 소행에 이의를 제기하거나 흥분할 입장은 아니었다.

일개 여행자 주제인걸.. 그들 조상의 불충문제가 나랑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런 공격을 받으면 답이 궁색해질 수밖에 없잖은가. 그러니 그런 관여는 안 하는 게 좋은 거다. 암튼 철공소에서 일을 하면서도 카페 활동은 제약받지 않았으므로 <리씽>에 접속한 이후 그 참신한(?)물에서 물갈퀴질은 계속 이어갔다.

 

그러므로 D시에서 보냈던 한철은 이를테면 몸의 여행인 철공소 현장체험과 <리씽> 활동이라는 마음의 여행을 병행하였던 셈이다. 이른바 융합 여행 프로젝트였다. 안붕어 아저씨가 입에 거품을 물면서 주창했던 융합 카테고리.. 하지만 아무리 융합 융합하고 융합이 좋다고 하더라도, 마음의 여행이 몸의 여행보다 우위에 있을 수는 없었다. 철공소에서 보낸 한철을 통틀어 그것은 예의상으로도 지켜줘야 할 여행자의 매너였으며 제삼자의 눈총을 생각해 봐도 지극히 당연시되는 일이었다.

 

H철공소는 적잖은 규모를 가지고 있어 많은 지구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철광석과 코크스와 석회석을 층층이 포개어 놓은 후 아래 구멍으로 인공적인 돌개바람을 휘휘 풀무질하듯 불어넣으면 그 도가니 안에서 지지고 볶고 별의별 지랄이 일어나 종국에 가서 시뻘건 쇳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그곳은 K국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3D 직종에 버금가는 열악한 체험 현장이었다. 쇳물 공장 옆에는 시뻘건 쇳물을 굳혀서 직사각형 쇳덩이를 맹그는 곳이 있으며 또 그 옆에는 직사각형 쇳덩이를 다시 길게 엿가락처럼 뽑아내면서 두루마리 화장지 형태로 감아내는 공장(일터)이 직렬연결되고 있었다. 그러니 당근 적지 않은 지구인들의 일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밖에...

 

여행자 신분을 감안해 준 모양인지 내가 체험하는 일터는 직렬연결된 공장 중에서 그렇게 돌돌 말려진 철판을 다시 돌돌돌 풀어내면서 자동차 껍데기를 찍어낼 수 있는 최종 판재류를 출시하는 곳으로 배정해 줬다. 철강제품을 맹근다고 하여도 비교적 육체적 노동량이 적은 곳이었다. 얇게 뽑아진 철판에 녹이 슬지 않도록 아연을 도금하고 후처리 한 후 다시 기름질 하여 돌돌돌 감아내는 공정이라 쇳물 맹그는 공장처럼 살갗이 익을 정도의 열기에 노출될 일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지구별에서 가장 기초적인 산업의 초석을 마련하는 철공소 일에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참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주 5일을 D시에서 소비하고 나면 주 2일을 S시에서 보낼 수 있었다. S시 거주지에서 접하는 소식에 따르면 K국 나라 사정은 아주 안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닭여왕이 무슨 미친 정신상태였는지 세상 떠난 홀애비 애인의 자식이랑 짝짝꿍 되어 나랏일을 꼴리는 대로 주물렀다는 비밀이 백일하에 드러나면서 집권유지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의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그것 참.. 안쓰럽기도 하고 돼먹지 못한 절딴난 가정에서 성장한 탓인가 싶기도 하고 별의별 생각이 무게구름처럼 피어올랐지만 대의적으로는 관심을 멀리하고 싶었다. 정치꾼들의 지랄뱅이는 너무나 많은 정신적 피로감을 던져주었으므로 여행도 여행 나름이지 그런 관심을 표명하는 여행은 정말 할게 못된다 싶었던 거다. 그리고 닭여왕의 안위에 궁금증을 표하는 것보다는 <리씽>의 물에 몸을 담근 채 물갈퀴질 하는 게 훨 나아 보였다. 정말이지 몸의 여행과 마음의 여행이라는 2중 플레이까지는 감당하지만 이데올로기 여행까지 포함시킨 3중 플레이는 무리였다. 그건 안붕어 아자씨도 100% 공감할만한 결론이라 여겼다. 잠시 말이 빗나가서 삼천포로 빠져버렸네.

 

다시 원위치하자면, 공업단지로 발돋움하려는 떠오르는 지방 도시 D시의 생활과 <K> 나라 인구 절반이 거주하는 수도권 S시의 생활은 판이하게 다를 수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여행도 2분법으로 갈려지게 되었다. 나로 말하자면 D시와 S시를 번갈아 오가는 와중에 잠시 매너리즘에 빠졌던 여행의 동력이 새로이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철공소 체험을 시작한 지 2~3년이 지났을 때쯤이었다.

 

나는 철공소 체험활동을 카페 <리씽>에 존재감을 오픈하며 나의 일상을 있는 그대로 알렸다. 그런 행동은 보잘것없는 나비의 날갯짓에 불과했지만 태평양 너머로 거대한 쓰나미를 휘몰아치듯 증폭된 결과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싶다.

 

<K> 나라의 여성들은 지적인 측면으로 볼 때

남성들의 능력에 비하여 결코 뒤처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구조에 매몰되어 있었다. 철공소 체험 현장에도 여성인력은 가뭄에 콩 나듯 하였고 대부분은 보조 역할을 하는 하급 직원으로 채워져 있었다. 유교적 전통에서 완전 해방되지 못한 사회 분위기 탓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생리적 구조에 연유하는 성적 정체성이 사회적 계급화를 촉발시켰을 개연성도 없지 않았다. 철공소 꼰대가 간부급 회의에서 임신한 여직원의 퇴사를 노골적으로 언급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으니 말 다했다. 그런 환경이었지만 21세기 인간 평등의 도덕률이 어디에 짱 박혀버렸는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런 나라의 분위기 혹은 남녀 간의 관계망 위에 떠도는 기운은 <리씽> 카페에서 여성들이 이성을 선택할 때 남성의 경제력을 최우선시하는 문화를 잉태한 듯하였다. 그러므로 어쩌면 나의 철공소 체험활동을 읽어보는 카페 여횐들이 경제적 측면에서 나에 대한 우호적인 감정을 싹 틔웠을 수도 있다. 나 역시 무의식의 작용으로 그런 노림수를 깔고 카페 활동을 이어갔었던 것일 수 있다.

 

그렇게 철공소 체험활동과 사이버 세상에서의 물갈퀴질이 교차되고 지속되는 기간이 연단과 인내의 시간처럼 지나갔다. 그 어느 어름이었다. 언제나 느끼는 일이었지만 연애의 기운은 언제나 나의 예측에 따라 현실화된 경우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도적과 같이 나의 예상을 깨뜨리며 다가와 놀래키는 것이었다. 그처럼 불의의 시기에 관심의 파도를 따라 포말에 실려 떠밀려 온 여인, 예기치 못한 인연의 줄 저편을 잡고 있던 한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이름하여 '엽(葉)'이었다. '목(木)'이란 K국 여행자 이름을 가진 나는 일엽편주처럼 사이버 강물을 흘러온 엽(葉)과 조우한 순간, 그 이름이 마치 햇살에 비친 잎사귀처럼 화사한 초록으로 빛나는 것을 보고 말았다.

 

엽(葉)은 유명한 짱개 영화 엽문의 사부와 종씨는 아니었다.

'엽'은 성이 아니라 이름이었고 '이파리'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영어로 'Leaf..'라 쓰는 '이파리'는 수많은 엽록소 공장을 내장한 초록 생명체이다. 초록별에서 초록으로 상징되는 여성을 만났다고 생각하니 신기한 일이었다. 마치 나를 위해 누군가가 비밀스럽게 예비해 두었던 고귀한 선물인 것 같았다. 이름 짓기를 좋아하는 나는 이 씨 성을 가진 그녀를 가리켜 리플리(Leaf Lee)라 칭하기도 하였는데 영어학원장이었던 그녀는 리플리라는 애칭(?)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다. ㅋㅋㅋ 당연하지. Leaf Lee가 Ripley와 동음이의어처럼 들리지 않는가?  나는 단지 <K> 나라 개신교인들이 성경인물 '한나(Hannah)'를 한글 이름으로 짓고 나서는 여권에 표기할 때 영어 스펠링 'Hanna'로 옮기는 정도의 문화적 차이로 여겼을 뿐인데..

 

사이버 강물을 따라 내곁으로 온 리플리(Leaf Lee)는 어떤 편이었는가 하면

자신의 핸펀 프사에 빨강 머리 앤의 일러스트를 올려놓고서 스스로를 빨강 머리 앤과 동일시하였던 중년의 돌싱 여인이었다. 나는 그녀의 동심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 천착하지 못했지만 그녀를 알고 난 후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그녀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형형한 눈빛을 가진 강호 고수. 그것이 내가 가진 그녀의 첫인상이었으며 겁도 없이 리씽 카페에다 그녀의 첫인상을 고백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내가 알아 왔던 <K> 나라 모든 여성들 중에서 최고라고, 까마득하게 낮은 신하가 하늘 같은 여왕에게 칭송과 헌사를 바치듯 그렇게 존중과 애정을 표하였다. 신기하게도 엽(葉)은 진짜 여왕인 것처럼 나의 추켜세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처세)이 아니었다.

 

엽(葉)과 조우하였던 일과 그녀가 강호 고수이며 내 인생의 최고의 여인이라고 고백하게 된 사연은,

어쩌면 그리스 로마시대의 큐피드가 시공을 뛰어넘어 21세기 <K> 나라에 짜잔~하고 나타나서 나의 눈에 콩깍지를 끼워주었던 사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범부에 불과한 엽(葉)을 과대평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엽(葉)이 내 마음에 들어왔다는 것, 그리고 나에게 콩깍지가 끼워졌다는 것, 결정적으로 아직까지 나의 눈에서 그 콩깍지는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지금 그녀와 헤어졌어도 내 마음은 여전히 그 이파리 주변에 머물러 있다는 사실이 그걸 입증해 주고 있다. 눈을 문지르면 콩깍지 감촉을 느낄 수 없는 것으로 보아 콩깍지가 씌워졌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 나의 상상에 연유한 것일 수도 있다. 아니면 한때 내 눈에 씌워졌던 것이 내면으로 녹아들었거나 내 몸속 어느 곳에서 길을 잃고 이 심장 저 허파 속을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되었든, 나는 엽(葉)을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고, 변함없이 보고 싶어 한다.

 

그리하여 아직 끝나지 아니한 이상한 나라 K 여행에 심신이 지쳐 마음이 울적하거나 하릴없이 무료한 날이 오면, 나는 멍 때리며 엽(葉)을 마음에 품고 엽(葉)에 관하여 생각하기를 즐겨 한다. 일종의 히타이트표 유리알 유희이자 사유놀음이며 저잣거리 어법으로 옮기면 <멍 때리기>가 된다. 특히 요즘처럼 코로나19가 전 지구를 강타하여 사회적 거리 두기의 족쇄에서 풀려나지 못하는 여행자의 몸과 마음은 빈대에게 물린 것처럼 왼 통 근질거리기 마련이다. 벌써 몇 번을 반복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여행은 몸이 하는 여행이 있고, 마음이 하는 여행이 있다. 엽(葉)이라는 여자 생명체가 생각으로 내 전신을 휘어잡는 순간이 오면 나는 몸의 여행을 중지하고 마음의 여행을 떠나기 시작한다. 즉, 나는 지경과 지경을 떠다니며 몸으로 여행하는 동시에, 마음으로는 공간과 시간을 뛰어넘어 순례자처럼 돌아다니는 투 페이스의 초월적 여행자였었다. 지금도 나는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만의 여행을 하는 존재이며, 자기가 소속된 지역사회 안에서도 얼마든지 마음의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믿는 편이다. 내편이 얼마나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시도하였던 마음 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사유>라는 무형의 장치에 있었다. 그러나 먼저 <어린 왕자>를 출간한 소설가가 있었고, 먼저 <유리알 유희>라는 어마 무시한 책을 집필한 문호가 있었듯이 <사유>라는 단어의 가치를 지구별에서 내가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상한 나라 K의 왕십리 똥파리 출신의 남자 시인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닐까 싶다. 그 시인은 <사유하는 사람>에 대해 기가 막히게 묘사한 한 편의 시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나는 여기서 이야기에 진정성을 부여할 목적으로 그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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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유 17호/서대경

 

사유 17호는 언제나 동네 17번 마을버스 정류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비 오는 여름날 정류장에서였다. 사유 17호는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때 절은 추리닝 차림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옆구리에 끼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가 말했다. 그곳엔 그와 나 둘 뿐이었으므로 나는 네, 안녕하십니까 하고 대답해 주었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가 말했다. 그렇군요 내가 말했다.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장마기간이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퇴근 후 정류장에 내렸을 때도 사유 17호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차양 끝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곳엔 더 이상 물방울이 맺혀있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가 말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나는 그를 지나 구멍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가게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자네도 잘 있었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 친구로 보이는 아이가 사유 17호의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음 날도 비가 왔다. 사유 17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네, 안녕하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렇군요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말없이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차양을 올려다보는 그의 치 떠진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동네 사람들이 왜 그를 사유 17호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지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사유 17호는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잠시 떠돌다 곧 잠잠해졌다. 나는 그가 앉아있던 붉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보았다. 차양 끝을 올려다보았다. 고드름이 맺혀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비가 내리는군요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에 몸을 기울이는 순간 버스 차창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사유 17호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넥타이를 맸고 머리를 멋지게 빗어 올렸으며 한쪽 옆구리엔 서류봉투를 끼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그의 무표정한 시선 위로 빠르게 스쳐가는 경멸 어린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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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를 읽어 본 이후 나는 때때로 나를 <지구별 여행자 사유 18호>로 소개하는 것이 더 합당하리라 생각했다.

몸의 여행과 마음의 여행이 차지하는 비중으로 볼 때 충분히 그렇게 부를 수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고 여기서 더 큰 의미를 부여하거나 의미심장한 은유를 하지는 않겠다. 나는 단지 사유할 수 있음에 감사하는 평범한 18호일 뿐이었다. 시인이 창조한 17호처럼 눈을 치켜뜨지도 아니하고 무표정하지도 아니하며 그냥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그러면서도 사유하기를 즐기는 필부의 하나에 불과하다. 단지 이상한 나라 K를 여행하는 동안은 사유 18호로 인정받고 싶었다. 일상에 파묻혀 사유하는 17호가 있으니까 나는 여행하며 사유하는 18호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사유>라는 유리알 유희는 묘한 즐거움이 달콤하게 스며들어 결코 포기할 수도 빼앗길 수도 없는 치명적인 매력이 차고 넘치는 놀이였다. 마치 숨어서 하는 연애처럼..

 

매우 다행스러운 일은 <K> 나라의 지배자 수첩공주에게는 텔레파시와 같은 염력이 없어서 생각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아비 장닭 각하는 <긴급조치>라는 가공의 염력으로 사람들을 옥죄었던 전력이 있음에 비하여 그녀는 그 정도로 강퍅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리플리를 만나던 시기 닭여왕은 이미 폐족에 가깝게 추락해 있던 처지였다. 그래서 나는 그 나라의 어느 지경에 있든지, S시에 있든 D시에 있든 언제든지 내 자유의지에 따라 내 마음에 엽(葉)을 담을 수 있고 그림 그릴 수 있었다.

 

D시 H철공소에서 체험 여행을 하면서 나는 마음 놓고 <리씽> 카페에 글쓰기를 병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구인 특히 <K> 나라 사람들은 책 읽기를 멀리하고 덩달아 생각하기도 싫어하며 만나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말초적 쾌감에 심하게 취해있음을 알게 되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카페에 올리는 글도 길이가 길어지면 무시당하거나 스킵되기 일쑤였다. 심지어 문단 나누기와 글자 크기를 원하는 조건에 맞추어 달라고 요청하는 횐까지 목격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어떤 사명의식의 발로까지는 아니지만 하나의 화두를 던져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남을 느꼈다. 사유하는 즐거움, 사유하는 자유에 대한 인식의 부재를 까발리는 한편 여행기를 통하여 특별히 <사유>의 간접경험을 유도할 수 있는 글쓰기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므로 닭여왕의 난장에 정신머리가 어질머리를 일으켜 힘들어하는 여행지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선물을 하였던 것이다. 실물 세상에서 몸으로 하였던 여행과 가상의 공간에서 마음으로 성취해 낸 소출에 대한 가감 없는 기록이자 서사를 어느 누구가 묻지도 않고 어느 누군가가 따지지 않아도 나 스스로 까발리는 것이다.

불특정 다수를 향하여...

 

나 어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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