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에 닿은 네덜란드인 하멜과 박연
왼쪽은 하멜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큄에 세워진 그의 동상이며,
오른쪽은 박연(벨테브레)의 고향인 네덜란드 데 레프에 세워진 그의 동상입니다.
하멜의 표류
17세기는 '동인도회사'를 필두로 네덜란드가 전 세계를 주름잡던 시대였습니다.
그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저에게 있어서 네덜란드는 튜립의 나라, 축구(요한크루이프, 반 바스텐)의 나라, 고흐와 렘브란트의 나라로 기억되고 있는 베네룩스 그룹 소속의 강소국입니다. 아마도 인종적으로 볼 때 전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민족일 겁니다. 유럽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인종적으로 키가 커지는 경향을 보이죠. 그런 관점에서 유추해본다면 17세기 조선에 닿은 박연과 헤멜도 종자학상으로 볼 때 키가 큰 인물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체적 우월성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쇄국정책에 쩔어있는 조선을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나중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 중 한 사람 하멜은 우여곡절 끝에 탈출에 성공하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하멜표류기>라는 책을 남깁니다. 비록 이들은 30년 정도의 나이차를 가진 사이지만 17세기 조선에서 서로 만납니다.
어떤 관계로요?
경향신문의 연재기사 중에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라는 게 있었습니다. 2015년 6월 16일자 인터넷 신문에 그가 쓴 '하멜이 박연을 만났을 때'라는 기사가 올라와 있습니다. 그걸 읽어보니 매우 재미있고 신기하고 뜻밖의 사연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글은 그 기사를 읽고 좀더 파고들며 궁리질한 내용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알쓸신잡입니다.
그 기사에 따르면 박연은 조선에 정착하여 벼슬까지 얻고 조선인으로 살아가고 있던 터였습니다. 26년차 조선인으로 살던 그는 어느날 외국 표류자들을 신문하기 위해 제주로 내려갑니다. 그곳에서 박연은 동향(네덜란드)의 인물 하멜과 그 일행을 만납니다. 그들의 인연은 알고보면 참 기구하고, 그들의 운명은 더더욱 기이한 결과로 치달립니다.
“너희는 서양의 길리시단(크리스찬)이냐?(爾是西洋吉利是段者乎)”
“야!(耶) 야!(耶)”
1653년(효종 4년) 8월 6일 자 <효종실록>에는 흥미로운 대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동남아에서 일본으로 항해하던 동인도회사 상선 스페르베르호가 제주도 해역에서 난파된 후 신방산 인근 해안에 표착합니다. 이때 네덜란드 상인들을 심문하고 임금에게 올린 보고서를 보면 위의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7세기 조선에서도 크리스찬(길리시단/吉利是段)이라는 존재를 인지하고 있었다는 게 놀랍군요. 그들이 심문한 서양 길리시단 가운데 한 명이 바로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이었습니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왜어(일본어)를 할 줄 아는 제주도 현지인의 통역을 앞세워 이 낯선 서양인들과 짧은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제주목사가 질문합니다.
“너희가 서양의 크리스천이냐?”
하멜 일행이 답합니다.
“야!(耶·예스)”.
왜(일본)어로 대화했다는 걸 보니 재미있는 당시 정세가 읽혀지는 듯합니다.
제주도 현지인은 왜(일본)과 가깝기 땜에 일본어를 할 줄 알았고,
네덜란드 상인이었던 하멜 일행은 일본과 무역이 성행하였으므로 일본어를 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조선 땅 제주에서 일본어로 소통이 시도된 겁니다.
거, 참....

그런데 제주도 현지인이 왜어를 하긴 하지만 아주 능통하지 않았던 탓일까요? 아니면, 하멜일행이 왜어를 하지만 그들이 아주 익숙하지 못했던 탓일까요? 하멜 일행은 손짓발짓까지 동원해서 자신들의 뜻을 아래와 같이 고집했습니다.
“우리는 일본 낭가삭기(郞可朔其·나가사키)로 가고 싶다”
17세기 조선에서는 일본 나가사키를 낭가삭기(郞可朔其)라 칭했군요.
하멜 일행은 일본으로 가던 길이었으니 당연하게 나가사키로 보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당시 하멜 일행을 태웠던 스페르웨르(Sperwer)호는 대일 무역을 위해 나가사키로 가던 중이었습니다. 나가사키는 조선이 일본 왜구들을 위해 개방한 동래 왜관 등과 같은 지역, 즉 일본이 네덜란드와 무역을 하며 개방한 도시였습니다.
<효종실록>은 "스페르웨르호 안에는 목향(木香) 94포, 용뇌 4항, 녹비 2만 7000이 실려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 물품의 가치는?
여기서 목향이란 국화과 다년생 풀로 약재로 사용된 것이고, 용뇌는 동남아에서 나오는 향료이자 약재이며 녹비는 일종의 시물 유기물로 이루어진 비료입니다. 배에 실린 이 물량들은 조선 화폐로 30만 냥에 달하는 가치를 지닌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재수없이 거센 풍랑을 만나 배에 구멍이 뚫리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로 인하여 선원 64명 가운데 단 36명만 살아남아 간신히 제주도에 표착한 것입니다. 1653년 8월 15~16일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팔월 중순이었으니 어쩌면 태풍을 만난 것일 수도 있군요. 암튼 하멜 일행은 죽지 않고 살아서 제주에 당도한 셈이니 운이 좋았던 자들입니다.
이렇게 제주도 땅에 닿은 23세의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 1630~1692)은 1653년 8월 16일부터 1666년 9월 4일까지 13년간 조선 땅에서 억류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여수항을 통해 탈출 후 네덜란드 상관(商館)이 있는 일본 나가사키(長崎) 데지마(出島)에서 1년간 머무르며 조선억류 13년간을 일지로 기록합니다. 무엇 땜에?
그것은 순전히 억류된 기간의 봉급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청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렇게 남겨진 일지는 필사본 형태로 귀국하는 일행의 손에 건네졌고, 네덜란드 출판사에서 책으로 출간됩니다.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두 종류의 책으로 출판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인기를 확인하니 네덜란드 뿐 아니라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에서도 책이 출판됩니다. 이를테면 하멜이 기록한 표류기의 출판은 조선이라는 '은둔의 나라'가 서양 세계에 알려진 계기가 된 사건이요 기록이었던 것입니다.
벨테브레(박연)와 하멜 일행의 만남
<효종실록>에 기록된 하멜 일행의 심문 보고서에는 중요한 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이전에 조선에 온 남만인(南蠻人) 가운데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있다. 박연이 (제주도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보고는 ‘과연 남만인이 맞다’고 확인시켰다. 서양인들은 대개 화포를 잘 다뤘기 때문에 훈련도감에 편입시켰다. 서양인들 가운데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효종실록>)
조선왕조실록은 문체가 매우 건조해서 공관서 문서 읽는 느낌이 강합니다.
문학적으로 그다지 영양가 없는 표현들로 채워져 있는 사실 기록서이자 일종의 청구서 근거 자료인 것이죠.
그러나 <하멜표류기>에 기술된 내용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닙니다.
17세기 조선의 객관적인 기록으로 치면
거의 유일한 것이니까요.
“1653년 10월 29일, 제주목사 옆에 붉은 수염 난 사람이 앉아 있었다. 목사가 ‘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냐’고 묻자 우리는 ‘홀란드(네덜란드) 사람인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목사는 ‘이 사람은 조선사람이니 너희가 잘못 봤다’며 껄껄 웃었다.”
<하멜표류기>
하멜 일행이 잘못 본 게 아닙니다.
붉은 수염난 인물은 박연이고, 그는 벨테브레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던 네덜란드 사람이었으니까요.
조정을 대신해서 제주도에 파견돼 하멜 일행을 심문하러 온 박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고향 사람들을 만난 게 거의 26년 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당시 박연은 네덜란드어 조차 거의 잊혀가는 지경에 처해 있었죠. 하지만 그는 얼마나 기뻤을까요?
윤행임의 <석재고>에 박연의 심정을 진솔하게 기록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박연은 하멜 일행이 네덜란드 사람인 것을 알고
“옷깃이 다 젖을 때까지 울었다”
고 전했습니다.
옷깃이 젖을 때까지 울어본 적이 없는 저로서는 그 절절함을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암튼, 조선 조정은 그때까지 ‘남만인(남쪽 오랑캐, 동남아시아인 or 네덜란드, 포르투칼인)’으로만 알고 있던 박연이
아란타(네덜란드) 사람이라는 것을 그제야 처음 알았다고 합니다.
“나는 데 레프 출신의 얀 얀스 벨테브레라고 하는 사람이오. 1626년 홀란디아호를 타고 고국을 떠났소. 1627년 오버커크호를 타고 일본에 가던 중 역풍을 만나 코레아 해안에 표착하게 되었소. 마실 물이 필요해서 보트를 타고 물에 올랐다가, 동료들과 함께 붙들렸소. 다른 선원들은 보트를 타고 모선으로 되돌아갔소.”
<하멜표류기>

<하멜표류기>를 보면 박연, 즉 벨테브레이 역시 조선에서 정착할 생각이 없었다고 합니다.
박연은 하멜 일행에게
“처음에 일본 땅으로 보내달라고 간청했지만 거절당했다”
는 하소연하였던 기록도 남아있습니다.
그러면서 박연은
“그 밖의 다른 점에서는 대접이 훌륭하며 필요한 모든 물품을 제공받는다”
라고 했습니다.
결국 조선 조정을 대표해서 파견된 박연은 하멜 일행을 설득하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미 박연은 돌이킬 수 없는 조선인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벨테브레가 조선 표착 후 26년이 지났지만 모국어를 너무 잊어서 처음엔 의사소통에 매우 어려움이 많았다. 매우 놀랐다.”
<하멜표류기>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최초의 서양인

그럼, 조선땅을 밟은 최초의 서양인은 누구일까요? 벨테브레인가요?
<선조수정실록>에 등장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마리이(馬里伊)' 또는 ' 빙리이(憑里伊)' 라 불는 국적불명의 인물이었던 그는, 1582년 1월 1일 요동 사람인 조원록 등과 함께 표류하다가 조선땅에 닿았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마리이 일행을 중국으로 가는 사신 편에 돌려보냈습니다. 마리이는 포르투갈어인 마링예이루(Marinheiro)의 첫 두 음절을 따온 것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1594년 임진왜란 당시 포르투갈인 신부 그레고리오 데 서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가 왜병을 따라 들어왔다고 합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침공한 왜병들 가운데 크리스천이 1만 8,000명이나 되었다는데(오마갓뜨!), 그는 종군신부로 조선에 들어와 전쟁고아들을 돌보다가 1년 후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정유재란 당시 명나라군 가운데 포르투갈 흑인용병 4명이 참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오~ 포르투갈..
일본에 조총을 전수한 것도 포르투갈인이 아니었나요?
암튼, 1598년 명나라 지원군 장사 팽신고는
선조 임금에게 파랑국(포르투갈) 군인들을 소개합니다.
“명나라 군이 4만 7000여 명이었다. 해귀(海鬼) 4명이 있었는데 살찌고 검고 눈이 붉고 머리카락이 솜털 같았다.”
<난중잡록>
당시 이 포르투갈 흑인용병들의 존재는 조선을 침략한 왜군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하네요.
하지만 명나라군은 이 흑인 용병들의 재주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고 합니다.
포르투갈 용병이 물러난 후인 1604년(선조 37년) 또 한 사람의 서양인이 조선땅을 밟습니다.
그가 바로 포르투갈(보동가류·寶東家流) 출신인 주앙 멘데스(지완면제수·之緩面第愁)였습니다. 경남 통영 산양읍 삼덕항에 표착했던 것인데, 조선시대 국경일지인 <등록유초>와 <연려실기록>을 종합하면 멘데스의 나이는 당시 34살이었고, 무역상이었습니다.
“지완면제수는 보동가류(포르투갈) 출신인데, 본국을 떠난 지 거의 15년이 됐다. 중국인들과 일본으로 무역을 하려고 가다가 왜적에게 약탈당한 뒤 함께 왜선을 탔다가 태풍을 만나 조선에 표착했다. 지완면제수가 거느리고 온 한 명은 흑인 노예(黑體國人)인데, 이른바 해귀(海鬼)이다.”
멘데스는 중국 복건성 사람 16명과 일본인 남녀 32명, 흑인 1명과 함께 조선 수군에 생포된 뒤 4개월 동안 조선 땅에 억류됐습니다. 그는 관례에 따라 청나라로 떠나는 외교사절(윤경립) 편에 다른 중국인들과 함께 송환됐습니다. 이 인연으로 경남 통영시와 포르투갈 대사관은 2006년 통영 산양읍 삼덕항에 ‘최초의 서양 도래인 주앙 멘데스’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그럼 최초의 서양 도래인은 주앙 멘데스가 됩니까? 위에 언급된 ' 마리이(馬里伊)'는요?
그다음이 바로 박연으로 알려진 네덜란드인 얀스 벨테브레가 표착한 사건입니다.
그는 1627년(인조 5년)에 표착하였고 귀화하여 조선인으로 생을 마감합니다.
그리고 하멜은 박연이 표착한 지 26년 후인 1653년(효종 4년)에 조선 땅을 밟게 됩니다.
벨테브레와 하멜의 운명은?
결론적으로 말하면 벨테브레(Jan Janse de Weltevree, 朴燕/박연)는 조선으로 귀화하여 조선여인과 결혼도 하고 아들 딸 낳아 잘 삽니다. 반면, 하멜은 3번에 걸친 탈출 시도 끝에 네덜란드로 복귀하는 데 성공하죠.
하멜의 탈출은 결코 순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조선 억류기간의 임금을 받아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었죠.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다 이루어냅니다.
의지의 화란인이었습니다.
1. 식수를 구하려 상륙했다가 조선에 발이 묶인 벨테브레
1627년(인조 5년) 네덜란드인 얀 야너스 벨테브레는 동인도회사 홀란디아 호 선원으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년 5월 12일, 우베르케르크호로 바꿔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가는 뱃길이었는데 제주도에서 표착하게 됩니다. 이때 벨테브레는 동료 드리크 하이스베르츠, 얀 피터스 베르바스트 등 2명과 함께 식수를 구하려 상륙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운명을 바꿔놓습니다.
제주도 관헌에게 붙잡히고, 동래왜관까지 이송됩니다.
하지만 왜관은 대일본 업무를 관장하던 곳이라 벨테브레 일행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도를 거부합니다.
“(벨테브레를 포함한) 남만인 3명을 왜관에 들여보냈지만 왜관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부산에 4~5년 머물렀다가 조정의 명령으로 서울로 이송됐다.”
<접왜사목초록>
벨테브레 일행이 일본행을 거절당했다면 선조 때의 마리이(1582년·국적불명) 및 주앙 멘데스(지완면제수·1604년) 일행처럼 청나라로 송환되는 것이 맞았을 겁니다. 기본적으로 조선의 해양정책은 쇄국이었습니다. 19세기 프랑스인 선교사 샤를 달레(1829~1878)의 회고담에 당시 시대상황이 잘 기술되어 있습니다.
“조선과 이웃나라 사이의 무역 관계는 거의 없다. 법률이 규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외국인과의 어떤 관계든지 사형을 받을 만한 범죄이다. 중국이나 일본의 어선이 평안도 연안에 와서 해삼을 잡고 황해도 영안에 청어를 잡는 것은 허가된다. 그러나 절대 뭍에 오르지 말 것과 바다 가운데서 조선 사람들과 절대 만나지 말아야 한다. 위반하면 배는 몰수되고, 선원은 투옥된다.”
<한국천주교회사>
다만 조난자들에게 ‘먼 곳에 사는 나라나 백성들을 살피고 어루만진다’는 인도주의 원칙을 적용했다고 합니다. 예컨대 “1797년 서양배가 출현하자 정조 임금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순풍을 기다려 빨리 떠나보내도록 하라”(<증정교린지>)고 지시합니다.
하지만 벨테브레 일행은 조선땅을 떠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조선에 정착해서 박연이라는 이름으로 산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마도 남만국 혹은 아란타(포르투갈어로 올란다), 혹은 얼굴과 수염이 붉다해서 홍이(紅夷)·홍모(紅毛)라 일컬어진 네덜란드 사람들의 기술이 좋았기 때문은 아닌가 싶습니다.
윤행임의 <석재고>는
“박연(벨테브레)이 병서에 능했고 홍이포 제작기술을 전했는데 그 기술이 뛰어났다”
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또한 성해응의 <연경재 전집>은
“남만인들은 기술이 좋고 역법과 의술에 정통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남만"이란 남쪽에서 온 오랑캐, 즉 동남아시아 및 서양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였습니다. 특히 대항해 시대를 거치며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 서양인들이 동남아 지역에 진출한 후에는 이들을 남만으로 칭했습니다. 조선 조정은 그런 네덜란드인들을 기술전문집단으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이 그들을 이용하려는 방법론을 잉태시킨 것은 아닐까요?
암튼, 조정의 명을 받은 벨테브레 일행은 동래왜관에서 서울로 올라와 훈련도감 군사로 편입됩니다. 그들은 투항한 일본인과 표류한 중국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를 이끄는 장수로 임명됩니다.
벨테브레는 몸집이 컸고 살이 쪘으며 눈은 파란색이었습니다.
조선여자와 결혼해서 아들과 딸까지 두었습니다.
그럼 물을 구하러 상륙했던 나머지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불행하게도 두 사람 즉 하이스베르츠와 베르바스트는 1636년 병자호란 때 전사합니다.
훈련도감 소속이니 조선을 위해 전장에 나갔던 모양입니다.
결국 벨테브레 혼자 조선인 박연으로 살아남게 됩니다. 아, 그가 20년 이상 홀로 조선에 남겨진 연고로 모국어마저 잊어버리게 된 것이군요. 그들의 운명은 완전 조선의 임금 손아귀에 달려있었는데, 보십시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북벌정책을 밀어붙입니다. 화포제작에 재능을 보인 박연은 나름 혁혁한 공을 세우고, 1648년에는 아예 조선의 무과에 응시해서 당당하게 급제한 뒤 정식무관으로 활동합니다. 박연은 홍이포라는 화포의 제도를 조선에 소개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1652년(효종 3년) 박연은 나라를 위해 재능을 떨쳤고, 드디어 홍이포 제도를 전했다. 기이한 일이다.”
<석재고>
이 기록에서 쓰인 표현 '기이한 일'은 '놀라운 일'이라는 뜻보다는
사견입니다만, '기뻐하고 경하할 일'이라는 의미가 감추어져 있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2. 유배당하고, 탈출 시도 3수 끝에 네덜란드로 돌아간 하멜

조선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한 박연이 불시착한 하멜 일행을 만난 것은 이 즈음(1653년)이었습니다.
박연이 조선에 귀화한 지 무려 26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옷깃에 눈물을 적시고 펑펑 울었던 것이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니었던 겁니다. 생각지도 않았던 조선땅에 닿아 ‘멘붕’에 빠졌던 하멜 역시 “훌륭한 통역자를 만나 우리의 불행한 처지를 잠시 잊을 수 있었다”(<하멜표류기>)고 기술합니다.
하멜 일행은 이듬해인 1654년 7월까지 인조반정 후 광해군이 지내다가 죽은(1641년) 유배지에서 보냅니다. <하멜표류기>는 이 유배지를 가리켜 ‘지금 국왕(효종)의 아저씨(광해군으로 추정)가 왕위를 찬탈하려다가 갇혀 죽은 곳’이라 썼습니다.
당시 제주목사 이원진은 그들에게 매우 호의적이었습니다. 난파선에서 건진 물건들을 하멜 일행에게 되돌려주었고 겨울 겹옷과 바지 신발 등을 제공하는 등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는 우리를 자주 밖으로 내보내주었고, 그 앞에서 네덜란드 말과 조선말을 써보도록 했다. 덕분에 조선말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됐다. 가끔씩 작은 잔치를 베풀어주었다.”(<하멜표류기>)
그랬던 이원진이 그 해(1653년) 12월 제무 목사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고초가 심해집니다. 새로 부임한 목사의 대우가 박해지자 하멜 일행 가운데 6명이 탈출을 시도합니다. 하지만 주민들에게 들켜 무산됐을 뿐 아니라, 이들 6명은 25대씩의 곤장을 맞고 한 달 동안이나 누워있어야 했습니다. 이후 사실상 죄수의 신세로 갇혀있던 하멜 일행은 서울로 압송되는데 그 와중에 1명(파울 얀 쿨스)이 사망합니다. 서울에 도착한 하멜 일행은 효종 임금을 만났고, “풍랑으로 배를 잃었으니 우리를 일본으로 보내달라”라고 간청합니다.
효종왈
“이 땅에 들어온 외국인을 내보내는 것은 국법에 위배되기 때문에 당신들은 여생을 조선에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북벌을 계획했던 효종이 네덜란드인들을 활용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왜냐하면 하멜 일행 가운데는 대포 기술자가 10여 명, 천문 이해자가 1명, 창틀 기술자가 2명, 조총 기술자가 1명 포함되어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하멜 일행은 훈련도감의 포수로 임명됐고, 그들을 감독하는 조장은 박연이 책정됩니다.
그리고 하멜일행은 매달 70말의 쌀과 옷, 총은 물론 호패까지 지급받았습니다. 조선인의 자격을 부여한 셈입니다.
그러자 한양 저자에는 하멜 일행을 보려는 구경꾼들로 가득 찼습니다. 관리들은 앞다퉈 그들을 초청, 연회를 베풀었는데, 이는 그들의 검술과 춤을 보고 싶어 했기 때문입니다.
“조선인들은 우리를 괴물로 여겼다. 음료를 마실 때는 코를 귀의 뒤로 돌리고 마신다든가, 금발이라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새처럼 보인다든가 하는 소문 때문이었다.”
<하멜표류기>
서양인들의 코가 얼마나 컸으면 코를 귀 뒤로 돌리고 음료수를 마신다고 했을까요.
이런 내력이 있어 1960년대 초까지 서양인이라 하면 '코쟁이'라는 용어로 통용되었던 것인가 봅니다.
하멜일행은 이후 유배를 당하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1655년 3월 청나라 사신이 조선을 방문했을 때 하멜 일행 가운데 수속 조타수인 헨드릭 얀츠 등 2명이 청나라 사신의 말고삐를 잡고 조선옷을 벗은 다음 그 안에 있는 네덜란드 옷을 보여주며 소동을 벌인 것입니다. 청 사신은 “밤에 사신의 숙소로 오라”라고 한 뒤 박연을 숙소로 불렀습니다. <하멜표류기>는 “자초지종을 들은 박연이 곧바로 효종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효종은 즉시 회의를 열고 청나라 사신에게 많은 선물을 보내기로 했으며, 불행한 두 친구는 서울로 호송돼 죽었다고 합니다.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남북산(南北山·얀츠를 지칭하는 듯)이 하소연하여 고국으로 돌려보내주기를 청했다. 청나라 사신이 깜짝 놀라 조선조정을 시켜 잡아두게 하고 기다리게 했다. 남북산이 애가 타서 먹지 않고 죽었으므로 조정이 매우 근심했다. 청나라 사신은 끝내 묻지 않았다.”
<효종실록> 1655년 4월 25일 자
조선 조정이 청나라 사신에게 뇌물을 듬뿍 주어 불문에 부치려 한 것은
청나라 사신들이 올 때마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수습하기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당시 청나라는 조선의 무장(武裝)을 의심하고 있었는데 효종의 북벌 계획이 들통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효종으로서는 박연과 하멜 일행 덕분에 홍이포와 조총 제작에 박차를 가하였는데 하멜 일행이 청나라로 송환되어 조선에서의 일을 까발리면 큰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멜 일행을 서울에 남겨둘 수가 없게 되었고, <하멜표류기>에 기술한 대로 하멜 일행의 처형까지 논의하였던 것입니다. 그 사실을 눈치챈 하멜이 회의를 주재한 인평대군(효종의 아우)에게 달려가 “살려달라”라고 애원했고, 그들을 측은하게 여긴 인평대군과 대군의 청을 들은 임금(효종)이 유배형으로 마무리 지은 것입니다. 일종의 인도적 차원에서 결정된 유배형이라고 하겠네요. <하멜표류기>는 “벨테브레(박연)를 본 것은 바로 이때였고, 그 이후에는 그를 보지도, 그의 소식도 듣지 못했다”라고 썼습니다.
1656년 3월 전라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된 하멜일행은 1663년 3월까지 약 7년간 살았습니다. 당시, 하멜 일행의 운명은 그들을 감시·감독한 전라병사가 누구냐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시스템이 운영되는 게 아니고 사람이 공사를 결정한 구조이죠. 예를들면, 어떤 병사는 지독한 부역을 강요해서 몸이 거의 벌거숭이가 될 정도였고, 먹을 것이 없어 동네 주민들을 상대로 구걸을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어떤 병사는 스페르웨르호의 무역품인 사슴가죽을 되돌려주는 호의를 베풀었기에, 그 병사 밑의 일행은 이 비용으로 겨울옷과 필수품을 장만하기도 했습니다. 또 어떤 전라병사는 서울을 제외한 먼 거리 여행도 허용해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부산 동래 여행도 허용했고, 여행기간도 15~20일이나 됐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기근이 강타했는데, 이에 따라 식량 부족 등으로 하멜 일행은 순천 남원 좌수영에 3개 집단으로 분산 수용됩니다. 여기서 하멜 일행은 기회를 잡아 탈출을 감행합니다. 친하게 지낸 조선인에게 ‘먼 섬에서 면화를 구입할 테니 배 한 척만 사달라’고 간청했고, 주저하는 배주인에게 두 배 값을 지불해서 배를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1666년(현종 7년) 9월 4일 밤, 전라 좌수영에 있던 하멜 일행 5명과 순천에 있던 3명 등 8명이 탈출합니다.
“우리는 쌀과 물, 물병과 냄비 등을 지고 성벽을 넘었다. 해안을 벗어나 작은 섬으로 가서 물을 채우고 돛을 올렸다. 5일 아침 지나가던 어부가 우리를 불렀지만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멜표류기>
3일 뒤인 9월 8일 아침, 배는 일본 규슈의 고토섬에 도착했고,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두 개의 칼을 찬 6명의 뱃사람이 하멜 일행에 다가오자 하멜 일행은 준비했던 네덜란드 깃발을 꺼내 외쳤습니다.
“홀란드(네덜란드)! 나가사키!”
이렇게 하여 1653년 8월 16일부터 1666년 9월 14일까지 13년 28일 이어진 하멜의 조선표류가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하멜 일행은 나가사키에 있던 동인도 회사에 인계됐고, 1668년 7월 20일 암스테르담에 도착합니다. 조선에 남아있던 나머지 8명(36명 중 16명이 살아있었다)도 훗날 본국으로 송환됩니다.
하멜표류기의 탄생과 그 이후


<하멜표류기>는 기행기도 아니고 애초에는 표류기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고국에 돌아간 하멜이 조선에서의 억류기간 도중 받지 못한 임금을 청구하려고 제출한 보고서였습니다. 물론 책으로 출판한 내용은 <하멜표류기 + 조선왕국기>로 구성되어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1668년 암스테르담과 로테르담에서 이 하멜의 보고서를 근거로 출판업을 하는 사람이 <하멜표류기>를 출판한 것입니다. 책이 나오자 네덜란드를 포함 유럽각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가 빼어난 문필가였기 때문에 인기를 끌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때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은둔지국 조선'에서의 표류이야기가 유럽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입니다.
1630년 네덜란드 호린험에서 태어난 하멜이 조선에 표착한 것은 23살 때의 일이었습니다. 천신만고 끝에 조선을 탈출한 하멜은 다시 한번 동방으로 항해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후 동인도회사 회계사로 일하다가 1692년 독신으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인생은, 그의 말년은 행복했을까요?
그렇다면 하멜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박연(1595~?)은 그 후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요?
네덜란드 북부지방인 드 라이프(De Lijp) 출신인 박연(벨테브레)는 하멜보다 35년 연상이었습니다. 박연이 고향을 떠날 때 부인과 자식이 있었고 그의 후손이 지금도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습니다. 조선 표착 후 귀화의 길을 택한 박연은 조선인 여자와 1남1녀를 두었습니다. 박연은 조선에 살면서 수도방위사령부 격인 훈련도감에 배속되어 근무합니다. 훈련도감에서도 외국인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고, 병법에 재주가 있어 대포를 정교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효종 때 북벌이 추진되면서 서양의 군사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박연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를 훈련도감에 배속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조선 땅에 오래 살면서 모국어를 잊었습니다. 하멜 일행과 만났을 때 제주에서 하멜 일행과 한 달 여 함께 지내면서 화란어를 다시 회복했다고 하멜은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하멜 일행을 많이 위로해 주면서, 국왕을 만나게 된다고 해도 다른 것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합니다. 이렇게 되자 하멜 일행은 통역을 만난 기쁨이 거의 슬픔으로 바뀌고 말았다고 기술합니다.
훈련도감에서 임금 호위병으로 근무하던 중, 하멜 일행 중 두 명은 청나라 사신에게 접견을 요청하는 사단이 일어나자 조선 조정은 청의 사신에게 뇌물을 써 무마하고 하멜 일행을 호남지역으로 쫓아내기로 결정합니다. 일행은 한양에 올라온 지 2년 후인 1656년 3월 전라도 강진 병영으로 유배되는데, 이때 박연이 배웅 나갑니다. 하멜과 박연의 만남은 2년간 이어졌을 뿐입니다. 하멜은 일지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3월 초 우리는 말을 타고 도성을 떠났다. 벨테브레와 지기들이 도성 외곽 1 밀렌(7.4km) 지점에 있는 강까지 배웅을 해주었다. 우리가 거룻배를 타자 벨테브레는 도성으로 돌아갔다. 이 것이 우리가 그를 보거나 또는 그에 대해 믿을만한 소식을 들은 마지막 순간이었다."
<하멜표류기>
그 후 박연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의 후손에 관한 기록도 없습니다. 다만 1991년, 네덜란드 벨테브레 가문의 후손(헹크 벨테브레)이 찾아와 박연의 후손을 찾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데 레프에 600여 명의 벨테브레 성을 가진 사람들이 주로 어업에 종사하면서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네덜란드는 박연의 고향인 암스테르담 북쪽 데 레프(De Rijp)에 그를 기리는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당신이 네덜란드인으로 태어나 17세기 대항해시대를 살았다면
그리하여 동인도 회사 선원으로 극동지역을 누비며 돈을 벌어들이는 직업을 가졌었다면
하멜의 길을 택했겠습니까,
아니면 벨테브레의 길을 택했겠습니까?
하멜은 활동적이고 모험적인 성향, 외향적인 성격의 인물인 듯합니다.
벨테브레는 기술자적인 면모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는군요.
하멜의 모험가로서의 삶은 몇 가지로 요약,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하멜은 세 번이나 탈출을 시도해 마침내 성공합니다.
처음은 제주도 표착 이후, 두 번째는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세 번째는 마지막 탈출.
② 하멜은 표착 선원 중 유일하게 자신의 근무지 동인도회사와 투쟁하여 조선 체류기간의 체불 임금을 받아냅니다. 대단한 노조활동가의 자질을 보여줍니다. 하멜은 1년여 기간 동안 나가사키에 머무르며 표류기를 제출하는 투쟁(?)을 벌인 끝에 체납 봉급을 받아냅니다. 1670년 동인도회사 이사회로부터 15년 치 밀린 봉급을 지급하겠다는 결정을 받아낸 것입니다. 조선 억류 기간 13년, 나가사키 체류 1년, 바타비야 에류 1년을 합친 금액입니다.
③ 하멜 일행은 탈출 후 조선에 남은 8명의 선원들의 귀국도 성사시킵니다. 이들은 나가사키 데지마의 네덜란드 상관을 통해 잔류인원 귀국을 위한 외교적 압박을 넣도록 했고, 이에 일본이 나서 이들의 귀국을 성사시켰습니다. 당연히 조선인 박연(벨테프레)은 빠졌구요.
④ 좋든 굴욕적인 체험이든 자신의 경험을 널리 알림으로, 하멜은 당대 유럽인과 후세 한국인들에게 17세기 조선의 참모습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하멜과 벨테브레,
두 사람은 각기 방식과 모습은 달랐지만,
조선을 위하여 적지 않은 일(공과)을 하였던 근대 네덜란드 인물인 것은 분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