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이돈형
나는 죽었다
비좁은 방에서 좀생이처럼 굴다 헐렁한 새벽에 끼어 죽었다
날마다 죽겠다는 거짓말을 하며 수많은 거짓말에 파묻혀 죽었다
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누구나 흔드는 생의 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 죽었다
죽고 싶다고 외치다가 죽어도 죽기 싫다고 외치며 죽었다
두 다리를 흔들며 복, 복, 복 거리다 복에 겨운 줄 모르고 죽었다
불행한 생을 흉내 내다 다정한 생의 지퍼를 열고 죽었다
독설을 뱉으러 비 내리는 한탄강을 찾아가 독설에 빠져 죽었다
육체를 사랑한 여인의 배꼽 위에서 그녀의 위로를 견디지 못해 시들어 죽었다
죽지 않으면 죽을 만큼 살고 싶어질까 봐 미안해 죽었다
짜장면을 시킬까 짬뽕을 시킬까 수없이 고민하다 죽었다
공짜 좋아하다 공짜로 얻은 죽음이라 좋아 죽었다
아주 긴 죽음에서 깨어나듯 그렇게 기지개를 켜고 죽었다
참 잘했어요! 도장을 꾹꾹 눌러 받고 나는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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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상
삶에 대한 반성은 연말에 어울리는 퍼포먼스다.
나는 아주 오랜만에 최근 5년간의 삶을 반성해 보았다. 꼭 죽어야 삶을 되새김질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살아도 죽은 목숨이 부지기수인 세상에서 5년의 기간이 10년의 기간보다 의미가 덜하긴 하지만 이젠 5년의 기간도 꽤 길게 느껴진다. 세상에 태어나서 세상에 고개를 내밀고 난 이후 쏜살같이 광속으로 날아가던 시간이 어느새 퇴행에 퇴행을 거듭하여 눈에 훤히 보이도록 느릿느릿 해졌다. 손을 뻗으면 시간이 손가락 사이로 잡혀 세세히 들여다볼 수 있을 것 같다. 산다는 것은 참 신비한 일이야. 아카시아 나뭇가지처럼 단단하고 뻔뻔스럽지...
2013 운명과 같은 한 해였다. 나에게도 운명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
2014 한 해 내내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손을 뻗은 여인의 손길도 생까버렸다.
2015 최악의 한 해였다.
2016 딸과 여행을 떠났다. 여행 가서도.. 여행에서 돌아와서도 딸과 갈등을 겪었다. 인생이 왜 이래?
2017 글을 쓰고 음악을 듣고 그림을 보며.. 또 사후세계를 기웃거렸다. 연말에는 뻔질나게 광화문 나들이를 했다.
2018 두 여인을 만났다. 14살 어린 한 여인은 내가 뿌리쳤고, 6살 많은 미국 교포로부터는 내가 퇴짜 맞았다.
정신을 차릴 때가 됐다.
사실 정신 차린다는 일은 결코 쉬운 게 아니다. 이 미친 듯이 신비로운 세상을 살아가려면 뭔가에 빠져 뽕 맞은 아해처럼 바람이 되어 날아다니지 않으면 좀처럼 건너기 힘들다. 요즘 어린 아해들은 독감 약을 먹고도 비슷한 증상을 겪는다고 한다. 세상은 요지경이고.. 나는 내 나이에 어울리게 또 요사스럽기 그지없는 세상과 조우해야 한다. 얼마나 쓰잘데기 없는 것에 정신 팔려 시간을 소비해야 피안의 대지에 당도할 수 있을까?
그래도 나는 시간마저 느릿느릿하게 만들었으니
이젠 정신 차리고 천천히 주변을 음미하며 세상과 친해져야 하지 않겠나?
짜장면을 먹을까, 짬뽕을 먹을까 고민하는 일은 이제 없어야 한다. 짜장면도 짬뽕도 먹지 말아야 하니까. 모두 흰 밀가루 음식이니 몸에 안 좋은 것 아닌가. 그렇다고 내가 중용의 의인으로 거듭나기는 요원하기만 하다. 기독교적 문화에 너무 물들어서 선명한 것에 마음이 혹하는 버릇은 좀처럼 고쳐지지 않을 듯싶다. 뜨겁거나 혹은 차거나.. 미지근한 것을 배격하는 이상한 문화를 소비하며 너무 오래 살아왔음인지 나는 중용의 나라에 살기는 글러먹은 것 같다. 2019년부터 어떤 쪽으로 발걸음을 내디뎌야 할지. 일단.. 정리할 것은 정리하기로 했다. 지난 5년간 나를 휘어잡았던 미망과 같은 기억들로부터 자유롭기로 했다. 정신 차리는 일은 거기서부터 출발한다...
2019년 년말에 읽고 쓴 감상인데
지금은 2025년이다.
세월이 언제 이렇게 흘렀나! 나 그동안 뭘했는데! 나 죽어 있었나?
그것도 아님,
나는 자유로워졌었나? 자유롭게 살았나?
Part 2. 음식 한 점(입)
곱창전골
암튼, 반성해야할 듯 싶었다.
그럼 음식 한 그릇을 앞에 두어야지. 그래야 반성이 되지..
불행한 삶을 흉내 내다가, 결국 뜨거운 맛에 취해버리는 음식이 바로
'곱창전골'이 아닐까 싶었다.
시인이 말한 것을 음미해본다
"불행한 생을 흉내 내다 다정한 생의 지퍼를 열고 죽었다"
시인의 말을, 글을, 음미하다보면 음식 한 그릇도 음미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시란,
음식과 함께 해야 제맛이 난다.
곱창전골의 비주얼을 처음 보았을 때 넌 어떤 기분이었어?
뭐, 이런 질문 받아본 적이 있는가?
이런 얘기들을 밑도 끝도 없이 나눌 수 있는 이성(여인)이 있다면 인생이 그만큼 더 풍요로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드는 날이다. 그럼 나는 다정한 그녀에게 이렇게 말해주겠지.
"그냥 볼땐 이 음식이란 거칠고 혼란스러워 보이지. 그런데 한 입 먹으면 고소하고 기름지고 쫄깃쫄깃 다정한 맛이 느껴지는 음식이 곱창전골이야. 아니, 일단 한 번 먹어 본 사람은 그담부터 거칠거나 혼란스럽다는 생각 절대로 안해. 그냥 입맛을 다시며 손을 보내는 거지. 직통으로 냄비에다가..."
그럼 너는 이렇게 받아칠런지도 모르겠네.
"처음엔 '힘들어, 인생이 왜 이래?' 하면서 먹다가, 나중에는 냄비바닥에 깔린 전골 국물까지 싹싹 비우며 '그래, 이 맛이야. 이 맛이 나를 살게 해주네' 이런 말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음식이 곱창전골인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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