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 17호-서대경
사유 17호는 언제나 동네 17번 마을버스 정류장을 떠나지 않았다. 그를 처음 만난 것은 내가 이 동네에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비오는 여름날 정류장에서였다. 사유 17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때 절은 추리닝 차림에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적 탐구』가 옆구리에 끼어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가 말했다. 그곳엔 그와 나 둘 뿐이었으므로 나는 네, 안녕하십니까 하고 대답해주었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가 말했다. 그렇군요 내가 말했다.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장마기간이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퇴근 후 정류장에 내렸을 때도 사유 17호는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물고 차양 끝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그곳엔 더 이상 물방울이 맺혀있지 않았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그가 말했다. 네, 안녕하십니까 나는 그를 지나 구멍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샀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가게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자네도 잘 있었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낄낄거리며 말했다. 그 친구로 보이는 아이가 사유 17호의 입에 물린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다음 날도 비가 왔다. 사유 17호는 불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물고 차양 끝에 엉긴 물방울을 보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네, 안녕하십니까 내가 대답했다. 비가 내리는군요 그렇군요 어제도 비가 내렸습니다 나는 말없이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차양을 올려다보는 그의 치떠진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동네사람들이 왜 그를 사유 17호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지 반년쯤 지난 어느 날 사유 17호는 사라졌다.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잠시 떠돌다 곧 잠잠해졌다. 나는 그가 앉아있던 붉은색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보았다. 차양 끝을 올려다보았다. 고드름이 맺혀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비가 내리는군요 혼잣말을 하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담배를 입에 물고 라이터에 몸을 기울이는 순간 버스 차창 안에서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그가 사유 17호임을 알아보았다. 그는 넥타이를 맸고 머리를 멋지게 빗어 올렸으며 한쪽 옆구리엔 서류봉투를 끼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그의 무표정한 시선 위로 빠르게 스쳐가는 경멸어린 미소를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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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감상
뻥치고 있네!
누군가 나에게 뒤통수 치며 일갈할 것만 같다.
좋아하는 시라더니 이게 무슨 시냐? 그렇게 이유 있는 반항(?)을 할 것만 같다.
오오 노노... 그러지 말아 주오.
나는 반항하는 사람을 싫어한다오. 나는 소통하는 사람과 알고 지내고 싶다오.
나랑 소통하려면 <사유>하시오.
사유 18호도 좋구, 사유 19호도 좋구.. 모두 유리알 유희를 즐기는 자라면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소. 서대경 시인도 사유하는 작자일 것이오. 어쩌면 그가 사유 17호일는지도 모르오. 사유 17호! 멋지지 않소?
사유를 하면서 궁극적으로 도달하려는 지점이 무엇이라고 가정하거나 정해 놓으면 오히려 일을 그르치게 되기 싶다. 당신이 아는 헤르만 헤세의 책 <유리알 유희>를 떠올려 보라. 헤세는 책에서 유리알 유희에 대해
'어떤 철사줄에 유리알을 주어진 유희의 명제에 따라 마치 음악에서 악보와 음표가 조화를 이루어 계속해서 음을 만들어 내도록 하는 과정'이라고 해석(?) 하고 있다. 아. 참나. 작가가 자기가 쓴 책의 제목에 대한 정의나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헤세 자신도 그것을 명확하게 알려주지 않고 있는게 유리알 유희다. 결국 '사유' 또는 '사유하는 행위'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비록 유리알 유희가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정의되어있지 않았지만, 유희의 정도가 높아질수록 구경하는 사람들이 놀라는 반응이 격렬해진다. 여기에 우리가 '사유'해야하는 목적성이 생기는 것이다.
쫌 어려운 이야기를 썰 풀듯 지껄이고 나서
하늘을 보니,
비가 오려는지 흐릿한 게 마치 하늘에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듯했다.
생각해 보믄,
꼬물꼬물꼬물 하늘을 기어 다니는 벌레라니 신박하다.
어제도.. 오늘도.. 그 모양이더니 결국 오늘 일기 중계소에서 비가 올 거라는 거품 품은 말을 풀어놓았다. 아, 그 기상 캐스터 몸매가 멋지단 말이야 이런 생각이 스멀거리며 기어 나온다. 아니 벌레가 하늘에서 기어 다니던 게 언제 나의 대뇌로 들어왔나? 아니. 입 벌리고 졸고 있을 때 입구녕으로 들어왔다고?
암튼 간에,
몸매가 멋진 기상 캐스터가 거품 물고 풀어놓은 그 말들은
지금쯤 김포 들녘을 가로질러 빈들의 마른풀을 헤집고 다니며 복음을 외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얘, 풀들아, 너너 이름도 없는 잡풀, 내 말 새겨 들어.
비가 온대, 비가 온다니까..."
아, 그러니?
그럼 비가 오면 나는 어떤 사람이 될까?
왜 이런 얘기를 하냐믄, 나는 날씨에 따라 변하는 놈(者)이라서 그러는 거야.
너는 비를 좋아하는 자(년.. 한자어가 없음)이냐?
보통.. 여자들은 남자보다 더 성숙한 존재들이기 땜에 비를 좋아한다고 카더라.
(팩트 아님. 나의 추정임)
그럼, 남자들은 어리기 때문에 눈(雪)을 좋아하는 걸까?
그건 모르겠고..
암튼 나는 태양을 좋아한다.
태양의 시절..
신록이 물드는 길 위로 은은한 햇살이 내리비칠 때 천상의 풍경처럼 신초록의 밝음이 누리를 점령하는 그런 순간이 좋다. 그때 나에게 다가오는 여인이 있으면 아낌없이 키스를 퍼부으리...
으리?
그래, 으리의 키스!
그런 사유를 해보는 것이다.
이 시는 사유하라는 명령을 은유하고 있는 것이니까 아무 주제라도 좋다.
사유하면 이 시를 느낄 수 있다.
치 떠진 눈이 사유의 희열을 상징하고 있다.
유리알 유희의 백미다.
앗! 또 '유리알 유희'가 나왔다. 젠장 참뜻도 모르믄서..ㅋㅋ
나는 비가 내리면
나에게 애인이 없으므로 함께 비 맞으러 거리를 쏘다닐 일도 없다.
대신..
빗소리 들으며 사유하게 되겠지.
사유 18호가 되어서. 아니.. 18호는 어감이 좋지 않으니까 사유 19호가 되도록 할께.
너는 사유 18호가 되던지..
내가 적극 밀어줄께.
헤헤-
Part 2. 음식 한 점(입)
표고버섯 라면
멍 때리며 먹기 좋은 음식이라면
"라면"이 댓길이다.
아, 저급하네.
겨우 생각해낸 음식이 라면이란다..
싫으면 말구.
나는 라면을 끓여 마시고 사유하련다.
그냥 만들어 먹으면 된다.
일단, 국물맛의 깊이를 더하려면 표고 버섯을 넣어야 한다.
거기다 시원한 뒤끝을 추가 하려면 포기김치를 썰어 넣고 김치국물까지 함께 부어 끓이는 거다.
거기에 한 가지 더
마늘 다진 거 왕창 넣자.
그렇게 라면을 끓여서 후루룩후루룩 들이마시듯 먹고
사유의 삼매경으로 떠나는 거다.
사유 18호를 찾아서...
나는 사유 19호가 되는 거지. 사유 17호는 끼워주지 말고..
우리끼리?
그래. 우리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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