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Daughter

잽잽..

hittite23 2025. 4. 4.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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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눈발이 심상치 않길래

출근하러 집을 나설 즈음이라 여겨지는 시간, 둘째에게 카톡을 넣었다. 내가 거주하는 D시는 서해안에 자리 잡고 있어 초겨울부터 초봄까지 눈이 잦고 양도 많이 내린다. 한반도에서 가장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은 어디일까? 사람들은 쉽게 울릉도를 머리에 떠올릴 것이다. 그건 맞는 떠올림이다. 그담으로는? 사람들 머리에 두 번째로 등장하는 지역은 모두가 생각하는 그곳, 비탈자치구(강원도)의 험준한 산악지형이다. 그런데 비교적 남부지방에 해당하는 서해안, 전북이나 충청 쪽에 눈발이 어마무시하게 많이 날린다는 사실을 아는가?

 

그건 사실, 아는 사람만 아는 이야기다.

그 지역이 강설지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은, 서해바다에서 생성되는 습기 머금은 구름에 기인한다. 바다에서 눈의 생성근거가 그리고 폭설의 원인제공이 마련되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서 둘째에게 내 염려하는 마음을 전달해주고 싶었다.

 

눈발이 날린다.

네 나왔어여.

 

둘째는 이미 출근 전쟁을 시작한 모양이었다.

나의 멘트도 짤막했지만 둘째의 리액션은 더 짤막하다.

이건, 말하자면 거의 천상천하 독존스러운, 이른바 신기에 가까운 부녀지간 '톡'이다. 

...........

각설하고,

어느새 나의 뇌리에는 과거 코리아 반도에서 사람들을 들었다 놨다 했던 프로복싱이 소환되고, 권투선수가 등장한다. 그땐 프로 복싱을 통하여 이름을 날린 선수들, 오늘날로 치면 스포츠 영웅에 해당되는 인물이 많았었다. 가장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사람은 홍수환선수일 것이다. 그, 어느 나라이지? 푸에르토리코였던가? 17세 무적의 남미 권투선수 카라스키아와 벌였던 적지에서 이룩해낸 4전 5기의 신화는 아마도 한국 스포츠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가장 오랫동안 세계 챔피언 벨트를 유지한, 실속 있는 선수는 유명우와 장정구였다. 특히 장정구는 테크닉과 펀치력을 겸비하여 꽤 많은 인기를 얻었었다.

좀 더 범위를 넓혀보자.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일조했던 선수는 중량급에서 박종팔, 경량급에서는 김태식이 단연 돋보였다. 특히 돌주먹으로 폭풍처럼 이름을 날렸던 김태식 선수는 챔피언 벨트를 획득하긴 했지만 오래 유지하지 못해서 아쉬움이 컸었다. 나의 기억에 의하면 그는 테크니션과 시합을 벌일 때 잦은 잽을 너무 쉽게 허용하여 자신이 가진 강펀치를 작렬시킬 기회를 잡지 못한 채 자멸해 버린 것이다.

잽은 가볍게 툭툭 던지는 탐색용 펀치에 불과하다.

그러나 잽을 자주 허용하면 점수를 잃고 있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면서 정신적으로 침착성을 상실한 채 무모한 승부를 걸고 싶은 충동질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장점을 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급한 마음에 성급한 공격을 감행하다가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여 패배의 쓴잔을 마시는 상태까지 내몰릴 수도 있게 되는 것이다. 권투는 스텝과 유연한 허리와 강펀치로 승부를 결정짓는 경기인데 뜻밖에도 잽에 의하여 경기의 흐름이 바뀌기도 하고 승패를 가르게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역시 예기치 않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스포츠의 묘미를 가진 것임에 틀림없다. 가장 야만적인 운동경기이지만 그런 반전이 숨겨져 있어 도전자에게 옵션이, 관중에게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게 해 준다.

둘째와 연애하면서..

나는 화려한 수사학이나 감동적인 에피소우드를 만들어내는 데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둘째가 관심을 가질만한 소재를 나는 매일 먹는 식량처럼 내놓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무뚝뚝하게 산부처처럼 아무 말 없이 지내는 것도 아니라는 자각이 일기 시작했다.

나는 항시 둘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둘째가 키우는 냥이 <만두>가 언제나 나의 행동거지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뜬금없는 말풍선을 날리면 고행석 만화의 불청객처럼 싱거운 사람이 되고 말뿐이며 차라리 아무 말도 않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해 낸 궁여지책은 <잽>을 날리는 것이었다.

이를테면 저녁에 퇴근하는 둘째에게..

이런 잽을 날린다.

 

-오는 데 춥지 않았니?

-네

 

짤막한 대화. 그러나 부담 없이 가볍게 주고받을 수 있는 말들..

 

또 다른 실례를 들어본다. 현관 근처에 내팽개쳐져 있는 니트나 면바지가 보일 때 무슨 목적으로 그 옷가지가 현관 근처에 나와있는지 잘 알면서 한 마디 던진다.

 

-이거.. 버리는 거니?

-네

<잽>을 날려 버룻 하다 보면 보다 부드럽고 유연하게, 둘째가 눈치 차리지 못하게 말 한마디 던지는 기술이 습득되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카톡으로 간단한 말 한마디 날리기를 하는 경우도 있다. 둘째의 답이 간단히 <네> 한마디로 끝난다고 섭섭해하지 아니하고 나는 가볍게 말풍선을 만들어서 툭툭 던졌다..

그런데 어느 날 어느 순간부터 나를 대하는 둘째의 말투며 표정이 우호적으로 변화되어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때 비로소 흥미 없는 등걸같이 둘째를 향해 내뻗었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내가 둘째를 많이 생각하고 있음을 둘째의 내면에 각인시키는 놀라운 결과를 이끌었음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소한 시도가 둘째로 하여금 나에 대한 믿음과 신뢰감을 형성하는데 일상의 자양분이 되어주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아주 말을 잘하지 못하더라도.. 그녀에게 관심을 품고 있으면 결국 상대방은 진심을 알아차리게 된다는 사실을.. 권투에서 잽은 상대방을 무너뜨리는 도구로 사용되지만, 사랑하는 관계에서 사소한 관심 표명은 마음을 열고 믿음을 심어주는 기적을 만들어낸다는 것을..

잽잽..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잽의 명수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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