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인티드 베일(The Painted Veil)을 보고 나니 새벽 1시가 되었다.
EBS 명화는 너무 늦게 방영한다. 금요 영화는 눈이 피로해 보다가 완감을 포기해야 했다. 왜 이런 시스템이 되었을까? 방송사 정책일까? EBS라면 유시민 누나가 이사장으로 있는 거 아닌가. 아님 정부의 입김 탓인가? 뭐, 내가 속속들이 알아낼 방법이 없으니 그냥 현상에 대한 대응 아니면 반응이나 잘하면 그만이지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 토요일이 되었을 때, 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제 나타나기 시작한 목감기 증세로 빌빌거리며 하루를 소비하게 되었다. 나이 먹는다는 사실을 영화 감상하며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냥 아다리가 이렇게 맞아 들어간 거지 뭔 나이 탓? 암튼, 이제 토요일도 가고 새벽으로 달려가는 이 시간까지 감기가 완전하게 떨어지지 않으니 영화 감상평을 쓰기도 만만치 않다. 젠장, 이거 거머리가 달라붙는 거라거나 헤어질 결심을 했는데 개똘아이 같은 상대가 쉽게 안 떨어지고 찰싹 달라부터 거머리가 되어버릴 때 정말 난감하겠다 싶었다. 이른바 스토커에 의한 스토킹 피해사례가 소환되며 급공감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언제나 느끼는 일이지만 나는 영화 감상평 쓰는 데는 영 소질이 없다. 왜 그럴까? 영화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읽는 것보다 주연배우의 외모와 표정, 스타일에 마음이 잘 빼앗기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페인티드 베일을 볼 때도 그랬다.
생뚱맞게도 나오미 왓츠의 웃는 모습을 볼 때마다 세상 떠난 전처의 웃은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환시를 보는 것일까? 전처가 나오미 왓츠만큼 이쁘지는 않은데 그 웃는 모습에서 전달되는 흐뭇함이 전처와 연애하면서 경험했던 마음과 동일시되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정이입까지 자연스레 진행된 것이다. 그리고 나는 영화 속의 여배우를 보면서 나오미 왓츠만큼이나 예쁜 미소를 짓곤 했던 그녀가 남기고 간 딸아이를 생각했다. 왜냐면 딸은 나와 다르게 이쁘다. 전처를 닮았는지 꽤 이쁜 편이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둘째와 연애하며 가족구성원으로의 의무감을 지킨다는 '자기 암시' 하에 살아왔다. 아, 자식이니 사랑하는 거 당연한 건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둘째 사랑하는 일에 여전히 서투름을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내가 틀렸고 둘째가 맞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이 그렇다. 양말을 한 번 신고 세탁기로 직행시키는 것은 둘째가 맞다. 나는 결국 나의 생활습성이 나태해져 있고 더러운 것임을 미처 깨닫지 못한 채 살아왔다가 글로 정리하면서 나와 둘째 중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건지 그리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둘째가 조명을 켜놓고 자는 것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둘째가 말하기를 자기가 키우는 냥이 <만두>가 어둠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솔까? 나는 그게 정말 맞는 말인지 의심을 떨쳐 버릴 수 없지만 둘째가 불을 켜고 자는 것은 자신이 가진 논리가 있으니 비난할 수 없는 일이다. 문제가 있다면 내가 둘째를 납득시키는 능력이 없다는 것이지.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화장지를 많이 사용하는 것도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관리하려는 의지의 발로가 아닌가. 내가 비데를 설치해 주지 않은 것이 잘못이요, 뒷물을 사용하도록 욕실 사용 문화를 바람직하게 유도하지 못한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둘째를 흉보거나 힐난하였던 세 가지 신공은 모두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니 둘째를 탓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사실.. 현재 나의 삶은 둘째와 연애하는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는 다시 외간 여인과 사랑을 나누는 기회가 예비되어 있지 않을지도 모른다. 이미 나는 그런 결과가 초래된다고 하여도 놀라지 않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다. 재혼이 없어도, 애인이 없어도, 여친이 없어도, 여사친이 없어도, 여지인이 없어도 나의 삶은 그렇게 비참하게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나 스스로가 그것에 노예 되어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자식을 만들었으니 나는 구태여 다시 외간 여인과 한 지붕 살이를 시도하지 않아도 되는 일, 나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제쳐 놓을 수 있는 처지다. 나는 이미 나에게 닥쳐올 미래의 삶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하였다. 그래도 자식을 사랑하는 일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인간의 주성분은 '사랑'이라는 어느 위대한 소설가 아저씨의 코멘트를 인정하는 전제하에서도.. 다행인 셈이다.
그런데 나는 둘째에게 사랑한다는 표현을 잘 못한다.
외간 여인을 만날 때는 그렇게 습관처럼 사랑한다고 되뇌었으면서 딸에게는 그런 말을 못 한다. 딸을 포옹하지도 못한다. 오, 이런 남사스러운 상상이라니.. 어떻께 다 큰 딸과 포옹을 하리?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기껏해야 어깨를 쓰담해 주는 정도...
사랑은 스킨십에서 나오는 것인데, 나 이래도 되는 것일까?
자식 사랑의 실천에 어설픈 아비라면, 차선의 방책으로 둘째가 웃는 일이라도 많도록 해야 한다.
이건 최선이 안되면 차선책을 찾아야 한다는 논리하에서 내가 궁리해낸 꼼수였다. 그리하기 위해서라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유머신공'이라도 쌓아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영화 페인티드 베일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계속했다. 영화 스토리와 전혀 관계없는데.. 영화 전편을 흐르는, 포커스를 잘못 맞춘 남녀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나의 뇌신경 뉴런을 마비시켰기 때문일까? 아니면 아직 목감기가 완전히 떠나가지 않은 탓인지 나의 사유는 방향성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못하다. 나는 과거에 만난 여인들과도 그런 식으로 사랑을 했었던 걸까?
설마 그랬을 리가...
만약 그리했던 거라면?
그렇다면 나는 딸과함께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알고 있는 것일까? 머리로 알고 마음에 새겨왔던 그 화두를 그 정도 행하는 것만으로는 안된다는 걸 깨닫고 이젠 뼈에 새기려 이렇게 글로 공양을 하는 것이겠지. 바라옵기는 '위에 계신 그분'께서도 나의 <공양>을 너그럽게 받아주시길 빌어본다. 이집트 파라오가 태양신에게 갖가지 공양물을 준비해서 줄줄이 기다리며 갖다 바치는 것처럼 나도 그리 해야 하겠지만 그 파라오들만큼은 할 수 없는 처지이니 나는 포용 국가에 살고 있는 보통 시민이라는 걸 공지하고 포용심 받으신 그분의 선처를 기다려야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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