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Daughter

봄등산

hittite23 2025. 4. 6.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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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 왔어요, 봄이..

 

 

 

 


"아침에 등산 가자더니 안 갈 거니?"

침대에 누워있는 둘째에게 물었더니 "늦게 잤어요. 못 갈 수도 있어요."라고 한다.

나는 둘째가 안 가겠다면 안 간다.

일단 외출을 포기하고 난 다음, 나는 TV를 틀어 주말에 송출되는 영화가 뭐 있는지 검색했다. 분명 어제 오전에 내가 검색했던가 프로그램을 훑어보았던 행위들인데 오늘 그걸 기억창고에서 끄집어내어 일상의 스케줄에 늘어놓으려 하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룬~ 이거 치매 초기 증상이 아님? 한국노인 10명 중 1명이 치매라던데. 문찌질 대텅은 집안 내력에 치매환자가 있는지 '치매', '치매' 하며 '정부의 지원' 운운 해대던데, 치매 내력이 없는 집안에서 태어나 만약 내가 치매에 걸리면?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건 젊어서 폭음을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짐작하는 것 외엔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 같다. 젠장, 술이 문제야. 술이...

노트북을 꺼내 이러저러한 작업을 하면서 나는 어제 뉴스를 듣던가 영화방영 자막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다 시간은 물같이 흘러갔다.

오후 3시가 넘어 둘째가 일어나더니 주섬주섬 밥을 챙겨 먹는다.

"등산은 안 갈 거지?"

시간이 시간인지라 나는 당연 시 하며 둘째에게 그리 물어보았다. 그러면서 아침에 등산을 못 가게 되면 산책이나 다녀오면 되지라고 침대에 누워 잠을 때리는 둘째에게 말하였던 것을 초식동물처럼 되새기는 것이었다. 둘째가 말한다.

"지금 가서 2시간 후에 돌아오면 되죠."

 

아니, 이런 예상치 못한 답변, 리액션을 받게 되다니.

나는 성은을 받은 무수리처럼 감복했다.

 

하던 일을 다 때려치고,

영화를 보니 어쩌니 궁리질 하던 거 다 물리치고,

주섬주섬 옷을 챙기고 나들이 나갈 채비를 급조하듯 준비했다.

그렇게 해서 봄 동산에 오르게 되었다.

 

봄바람을 맞으며 버스정류장까지 가서 봄 버스에 몸을 싣고 인근의 봄 동산 입구에서 하차했다. 봄동산이라 하는 곳은 그래도 동산보다는 조금 높은 곳이다. 인근의 네댓 개 동네에서, 혹은 버스 정류장 열개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산정이 올려다 보이는 이를테면 '산'이라 해도 아무런 쪽팔림이 없는 높이의 산이다. 내가 부드럽게 순화해서 '봄동산'이라 표현했다고 진짜 '동산'이라고 알면 안 된다. 질 낮은 어떤 정치인 새끼가 말한 것처럼 '○○한다'했더니 진짜 '○○'하는 줄 알았냐고 오리발 내밀어도 되는 그런 류의 개그가 아니다. 내가 둘째와 함께 오르려고 하는 '산'은 '봄동산'이라 하였으되 '동산'이 아닌 진짜 '산'인 것이다.

 

봄 길가에 있는 만두와 족발 파는 가게 앞을 지나가려니 아직 나는 점심을 먹지 않았음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뭐 하느라 점심을 안 처먹고 있었나? 참나..

"만두 먹을래?"

내가 물으니 둘째가 고개를 끄덕인다.

"뭘로 할래? 고기만두?"

둘째는 투명한 외피의 별미 감자 김치만두를 선택한다. 뭔가 새로운 맛을 볼 수 있다고 느낀 모양이다. 얍삽하게 생긴 데다가 홀쭉한 송편 같은 만두 10개를 4천 원 주고 사서 길거리를 걸으며 둘째와 함께 먹었다. 금방 동이 났는데 맛은 그런대로 먹을만했다.

이번에는 둘째가 생수를 한 병 사자고 하길래 편의점에 들렀는데 나는 배가 출출한 듯해서 마늘 바게트 한 봉지를 더 샀다. 그걸 산 중턱으로 이어주는 돌계단을 오르며 한 개씩 꺼내 먹었다.

둘째는 벌써 힘든 기색이다. 팔팔하게 젊은 녀석이..

"힘드니?"

내가 둘째에게 물었다. 돌계단 양옆으로 무질서하게 자리 잡고 살고 있는 벚나무 기둥이 봄 햇살을 받아 반지르르하게 짙은 잿빛으로 윤기를 내고 있었다.

"네."

하고 둘째는 솔직하게 대답한다. 내가 둘째에게 제일 좋아하는 것은 솔직함이다. 나를 닮은 구석의 하나였다. 돌계단을 힘들게 올라 당도한 평평한 평지에서 다시 둘째는 등산 코스를 찾아본다. 벌써 산 아래 경치를 일망대해처럼은 아니지만 신선을 아래로 내깔기며 돌아볼 수 있는 높이에 도달한 셈이다.

나는 대충 방향을 잡고 기분 내키는 대로 오르는 타입인데 둘째는 지방 관공서에서 제작하여 설치해 둔 이정표와 등산지도를 훑어보며 갈 길을 정한다. 어느덧 산은 봄빛으로 물들어 개미처럼 기어오르는 인간 종족들을 아무 값없이 자기 품에 안아주고 있었다. 산은 품이 넓고 넓어서 인간족들 품어주는데 부족함이 없다. 하늘엔 봄 태양이 은은하게 떠올라 온기를 전해주고 있다. 태양이 그렇게 열일하고 있는데 훼방꾼 봄바람이 몸을 할퀴고 지나가면 가슴이 서걱거리곤 했다. 바람은 불청객이다. 초여름이 오기 전까지는 불청객이 지위를 면할 수 없다. 그러나 불청객의 시샘을 받았더라도 봄 동산을 오르기 위해 몸 밑바닥에 저장해 두었던 연료를 태웠기 때문인지 이내 열기가 넘쳐나기 시작했다.

나는 딸과 함께 오고 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아직 꽃망울도 내비치지 못하고 있는 벚나무 특유의 윤기 나는 기둥을 감상하며 산길을 걸었다. 옛날 어느 시인은 아카시아 피어나는 언덕을 오르며 '삶은 대단해'라든가 '삶은 단단해 이 아카시아 나무처럼'이라든가 주절거리며 자연과 대화하는 걸 읽은 기억이 났다. 벚나무는 까무잡잡, 반지르르하게 흑회색 윤기를 내면서 봄태양에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봄동산의 사이사이로 이어지는 봄길을 걸으며 둘째와 시시껄렁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렇게 산책하는 시간이 왠지 굉장히 의미 있는 시간처럼 여겨졌다.

그렇게 봄동산 오르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봄 버스를 잡아타니 둘째는 금방 졸기 시작했다. 봄날엔 꾸벅이는 게 대세인가? 나는 그런 녀석의 고운 옆모습을 쳐다보며 나의 마음이 딸의 마음에게 가만히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다.

 

"오늘 같이 등산 가자고 말해줘서 고마워"

 

 

 

봄등산하고 나니 나른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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