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 딸이 가지고 있는 신공(神功)이 세 가지 있다.
첫째는 화장지 어지르기 및 광속 소비하기..
화장지 한 박스를 사다 놓으면 술술술 실이 풀려나가듯 화장지가 화장실 휴지통으로, 둘째 방 침대 위나 탁자 혹은 방바닥으로 위치 이동한다. 그리고 둘째가 머리 손질하고 전신거울로 외출 변신한 자신의 몸을 살펴보는 데 사용되는 자기 언니방 책꽂이 사이사이로 화장지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진다. 아마도 둘째 눈에는 화장지들이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게 틀림없는 듯하다. 맨날 내가 쫓아다니며 치워야 하니까.. 여자가 되어서 아빠가 화장실 휴지통에 수북이 쌓아놓은 밑 닦은 종이며, 핏빛 머금은 생리대를 치우는 게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이다. 설마 아무렇지도 않을까.. 쪽팔리거나 수치스럽거나 그래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런 내색을 않는 걸 보면 둘째 눈에는 자신의 손을 떠난 화장지가 눈에 보이지 않게 사라져 버린 것이 사실에 가까워 보인다.
내가 해야할 미션은 단순히 널브러진 화장지를 주워 담아야 하는 것만이 아니다. 두루마리 화장지는 자기 방 침대 위에 하나, 거실에 하나, 머리단장하는 언니 방 책꽂이에 하나, 거실 식탁 위에 하나... 그렇게 요소요소에 배분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 화장지 안쪽 링에 사용한 종이들을 꼬깃꼬깃 쑤셔 넣곤 해서 매번 그것을 손가락 찔러 넣어서 빼내야 한다. 아마 조선 천지에서 화장지 킬러로 둘째 간다면 서러워할 아이가 내 둘째 딸일 것이다. 욕실 휴지통엔 두루마리 형태로 둘둘 말려 뭉텅이로 사용되고 버려진 화장지들이 소갈비처럼 빨간 고무장갑에 실려 나오기 일쑤다.
두 번째 신공으로는 전굿불 켜놓고 자기다.
일단 외출해서 귀가하면 식탁 위의 전등을 켜고, 싱크대 위의 전등도 동시 패션으로 작동시킨다. 그리고 냉장고에 쟁여놓은 자신의 식량이나 음료수를 소비한 후 방과 화장실의 불을 켠다. 한 번 키면 내가 가서 끄거나 아님 끄라고 한 마디 조심성 있고 예의 갖춘 목소리로 읍소하기 전까진 계속 켜져 있다. 심지어 화장실 조명을 계속 켜놓고 있는 바람에 그쪽 루트로 연결된 차단기가 off되는 일도 일어난다. 아이 엄마가 아이 키울 때 불을 켜놓은 상태에서 잠을 재우고 했던 내력 때문일까? 아니면 천상천하 유아독존형 귀차니즘 때문일까? 나는 단순히 그런 인식으로 녀석에게 잔소리를 퍼붓곤 하다가 녀석이 실토하기를 우울 증세를 느끼면 만사가 다 귀찮아진다는 말을 듣고 나서는 변신로봇이 되어버렸다.
이후론 둘째에게 아무런 태클을 걸지 않기로 마음먹었고, 신기하게 잘 실천이 되고 있다.
'아.. 이건 쟤가 마음씨가 나빠서 그런 게 아니야. 자기도 힘드니까 자기도 모르게 처신하게 되는 것일 뿐.. 어쩌면 내가 아이 엄마를 만나 녀석들을 만들어 내는 원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어. 그럼 당연히 감수해야 되는 일이잖아.'
그렇게 마음먹는다. 그리고 시간이 가고 세월이 가면 자연스럽게 둘째의 바람직스럽지 않은 습성들도 고쳐지게 될 거야라는 근거가 불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둘째에게 감정 상하는 말을 가능하면 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이거 실천해보면 첨엔 어려움이 없잖아 있었지만 어느새 잘 적응하게 되었다.
세 번째는 빨래신공...
둘째는 내가 기절초풍할 정도로 수건을 자주 갈아치우고, 자기 양발과 옷가지 세탁을 빈번하게 한다. 세정제를 자기 돈으로 사다 쓰는 것에 그나마 감사해야 할지.. 한 번 신은 양말은 무조건 다시 세탁해야 한다. 수건도 거의 한 번 쓰면 다시 세탁기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듯하다. 아... 이 집안이 찜질방도 아니고.. 왜 그렇게 자주 옷을 빨아대는지... 나는 양말을 한번 꺼내 신으면 이틀, 경우에 따라선 사흘까지 신는데... 나는 수건 하나 꺼내 쓰면 일주일 이상 사용하는데... 나는 화장지 사용할 때 결코 다섯 칸 이상 사용하지 않는데.. 나는 매번 화장실 다녀오면 불 끄고 환풍기 끄고 요즘 같은 계절에는 보일러 꼬박꼬박 끄는데... 그런데 둘째는 'On' 시킬 줄만 알고 'Off' 시킬 줄은 모르는 사람처럼 존재한다.
오늘 아침에도 둘째가 일찍 일어나 기척을 보이다가 침대 위에 올라가 잠든 듯하여 불을 끄러 방문을 열었더니 자는 게 아니었다. 침대 위에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길래 멋쩍어서 바닥에 널브러진 종이를 집어 들며
'이거 버리는 거지? 자는 줄 알고 불 끄러 들어왔는데..'
라며 썩소를 지었다. 마치 말썽꾸러기 꼬맹이가 엄마가 하지 말라는 걸 했다가 혼날까 봐 변명하듯이..
그러면서 헛기침을 했는데..
사실 어제 낮에 거실 소파에서 낮잠을 때리다가 뭔가 잘못이 있었는지 저녁부터 으슬으슬해서 알쓸신잡 본방도 사수하지 못했고 아침에 일어나니 몸살기는 없어졌지만 목이 간질거려
'목감기가 왔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랬더니 둘째가 감기약 어디 있을 거예요. 한다.
사실 이 녀석이 사다 놓은 약들도 장난이 아니다. 무슨 위장약이 몇 팩이 남아있고, 코감기 약도 있고.. 또 무슨 연고니 알약들이 사용 기한 안쪽에 자리 잡고 있어 버리지 않고 모아둔 것들이 즐비하다. 녀석이 일어나서 목 감기약을 주섬주섬 찾는다. 아.. 이 녀석이 자기 키우는 냥이 밥 떨어졌다 하면 칼같이 일어나 사료를 챙겨주곤 해서 나는 개(고양이) 만도 못한 인생인가 보다 하고 한탄했는데.. 그래도 그녀는 나의 핏줄이긴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코감기 약은 있어도 목 감기약은 없다. 내 기억으로 최근 10년 동안 감기약 사 먹은 게 생각나지 않는다. 나는 별도로 감기약 사러 약국 나들이할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다. 그냥 버틴다. 그게 건강에 더 좋은 것일는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데 아침부터 오후까지 머리 회전이 잘 안 되고,,, 미열기가 조금 있는 것 같은데 그럼 신열과 미열의 차이는 뭘까 씰데없는 상상이나 하면서 시간을 죽였다. 이렇게 사는 것은 불금과 어깨동무하고 있는 토욜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아.. 내가 원래 예의 없는 남자였지. 나는 다시 한번 썩소를 날렸다.
위에 계신 그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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