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연기를 결정하고 난 후,
그녀가 직원들과 회식할 때 들르곤 하였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함께 하였다. 레스토랑에 가는 도중에도 나는 여행 연기한 사실에 못내 아쉬운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우린 무슨 이야기를 하였지? 지금도 습관처럼 그날의 일을 복기해 보곤 한다.
"당신, 언제 첫 경험을 했어요?"
그녀가 왜 그런 질문을 하였는지 모르겠다.
나의 신상에 대해 직접적인 질문을 별로 하지 않던 사람인데.. 여행지에서 여성들과 겪었던 사연들을 입에 올리기 좋아했던 나의 탓일 수도 있다. 하지만 품위 있고 예의 바른 그녀가 질문의 화살을 그런 식으로 가슴에 내리꽂았을 리 만무했다. 스쳐 지나가는 바람의 유혹에 그만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오픈해 버린 나무처럼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밀하게 감추어져 있던 지난날의 이야기를 발설하고 말았다.
"응, 군 입대 전 교회 친구가 데려간 룸살롱에서 동정을 잃었어."
내용은 간단하게 한 줄로 요약된다.
나는 그렇게 맹추 짓을 했고, 나의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특별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무대응, 무 리액션을 보면서 나는 비지 찌꺼기가 마음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듯, 찝찝함을 해소할 수 없었다. 실수를 한 것이다. 실수도 익스큐즈 받을 수 있는 게 있고 그렇지 못한 실수가 있다. 나는 용납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했다. 급기야 그런 말을 내뱉은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나는 연애의 ABC 중 A에 해당하는 금언을 어겼던 것이다.
이곳은 어디인가?
유교 문화가 바퀴벌레처럼 질기게 기생하는 이상한 나라가 아니던가. 그녀들은 차라리 거짓말을 할지언정 지난 과거를 곧이곧대로 까발리는 남자에게 경멸과 연민의 눈초리를 쏘아댈 뿐이 아닌가.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하거늘.. 나는 여행안내서를 좀 더 주의 깊게 읽었어야 했는데,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자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녀와 저녁 식사를 어떻게 마무리 지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귀가하는 내 마음은 짙은 봄밤보다 더 어두웠고, 허우적거리는 내 영혼은 길 잃은 어린 양처럼 처연했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도무지 깊은 잠을 잘 수 없었다. 꿈속에서 불쑥불쑥 악귀가 튀어나오곤 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할 때면 이것이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연단의 시간'이기를 희원했다. 하지만 큰 잘못을 저질러버렸다는 자책이 희망의 싹을 싹둑싹둑 잘라 버리는 꿈만 꿀 뿐이었다. 다음날 나는 대지를 비추는 밝은 아침햇살 속에서 충혈된 눈알을 비비며 마지못해 철공소 체험 실습장을 향하였다.
출근하여 사무실 앞 공터에 렌털 받은 차량을 주차하려는데
엽(葉)으로부터 뚜르르 뚜르 전화가 걸려왔다.
순간 긴장감이 엄습해 왔다. 받을까 말까 나는 잠시 망설여졌으나 받을 수밖에 없었다. 삼실의 다른 직원들이 있을 때면 전화를 받기 더 곤란해지니..
그녀는 특별한 이야기를 하려고 전화를 걸어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스스로 마음의 감옥에 갇힌 듯 그녀의 일상적인 태도에 일상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상대를 편안하게 해주지 못했던 것이다. 그건 지난밤의 일에 대한 자책에서 완전 빠져나오지 못한 소심한 A형 순진남의 초상인데 어찌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언제나처럼 자근자근하게 내일 고딩 아들이 수학여행 떠나는데 챙겨 줄 준비물 쇼핑하러 나왔다고 말했고, 나는 무슨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잠시 머뭇거렸다. 촉이 발달한 그녀가 "왜? 무슨 일인데? 말해봐요" 라며 재촉했다. 그녀의 반응이 아마도 나의 후속 발언을 유도한 것 같았다. 시간을 지나 뒤돌아보니 그렇게 판단되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저런 이성적인 판단이나 해석을 하지 못했다.
나는 사고를 당해서 렌털받은 차량을 정차하여 시동을 끈 후, 악마의 아가리로 빨려 들어가듯 원치 않는 대화의 늪으로 휩쓸려버리고 말았다. 백상아리의 이빨에 치명적인 외상을 받기라도 했던 것인가, 나는 정신이 혼미해져 또다시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내고 말았다. 무의식에 잠들어 있던 '어른 아이'가 예쁜 공주님이 깨운 것도 아닌데 벌떡 일어나 버린 것이다.
"당신에게는 나보다 더 신실한 사람이 어울리는 것 같아.."
나는 신자였지만 무늬만 신자이므로,
더구나 어젯밤 숨겼어야 할 치부를 발각당하고 말았으므로,
죄 사함을 얻지 못하면 이 사랑의 운명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확답을 듣고 싶었던 것이다. 어른 아이는 치졸하게도 그런 철부지 행동을 하고 말았다. 그러나 경영자이면서 개신교 집사이기도 했던 그녀는 의외로 쿨한 반응을 보였다. 죄 사함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알겠어요. 괜찮아요.
많이 생각해서 꺼낸 말인 거 같은 데 저도 당신 핸펀번호를 지우도록 할께요."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천붕(天崩)'이라고 한다.
친부가 돌아가셨을 때 무덤덤했던 나는 뜻밖에도 엽(葉)의 결별 통고를 받아 들자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심하게 자의적으로 해석하면 그녀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반응을 보인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오 마이갓! 그것은 분명 결별 통보였고, 지금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다. 그날 내가 치기 어린 표현으로 그녀의 마음에 상처를 내었던 이면에는 그녀가 사랑하는 나를 잡아주기 바라는 꿍심이 도사리고 있었다. 사랑의 운명을 도박 걸듯 한 것이었다. 사랑을 도박처럼 다루었다니. 이런 천하에 몹쓸.. 그것은 순전히 에덴동산에서 하와에게 다가갔던 악마의 꼬임에 넘어간 탓이었다. 하지만 그런 어리광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는 투정이었다. 그녀는 스스로 고용한 학원 강사를 잘라내듯 깔끔하게 나의 어리광을 정리해 버렸다. 하지만 어떻게 인간이 한 인간을 그리 쿨하게 정리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런 통화는 길게 이어갈 수 없었다.
나는 하루의 일과를 위하여 사무실로 올라가야 했고, 일을 하면서 그녀에게 이런 심각한 문제를 노정시키는 대화를 시도하는 게 어려웠다. 사람에 따라선 가능한 일이기도 하며 어떤 이는 아주 질기게 붙잡고 늘어지면서 사랑의 복원을 위해 애를 쓸 법도 한 일이었다. 나는 그런데 정신을 차릴 계제가 아니었다. 하루를 그렇게 의미 없이 허비했다. 그다음 날, 비로소 정신을 차린 나는 그녀에게 본심은 그게 아니었어. 진짜야. 본심은 절대 그런 게 아니었어. 수십 번 사과하고 변명하였다. 그러나 이미 돌아선 그녀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고, 그녀는 전화연결이 안 되는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얼굴 한 번 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리곤 시간이 속절없이 흘렀다...
주말이 되어 S시로 복귀하러 가면서
나는 와인과 장미꽃 한 다발을 사들고 그녀가 사는 아파트 입구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전화를 받아주지 않으니 무턱대고 갔었고 무작정 기다렸다. 밤늦게, 자정이 넘어 2시를 향해 갈 때까지.. 하지만 중봄의 야밤을 차 안에서 지새우기엔 너무 추웠다. 추위에 오돌돌 떨면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결국 정착촌 S시로 복귀하고 말았다.
Y시를 점점이 떠나가면서
캄캄한 밤보다 더 어둡게 가라앉은 마음을 보듬고 간신히 간신히 운전을 마쳤다. 아, 사람이 이런 날 자동차를 몰면 사고사를 당하게 되는 거구나 그런 뚱딴지같은 생각도 떠올리면서... 결국 장미 꽃다발은 영문도 모르는 둘째 딸을 위해 바쳐졌고 그날의 불발된 만남 이후로도 나는 계속 그녀를 찾아다녔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닌가. 어떻게 사랑을 이런 식으로 끝낼 수 있다는 말인가.
나는 새로 시작한 그녀의 신규 사업장 위치를 몰라
사귀면서 수다 떨던 그녀의 이야기를 소환했고
그걸 실마리 삼아 Y시 이곳저곳을 쑤셔대었다. 마침내 한 달 뒤 그녀를 만나는 데 성공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듯이 나는 그녀를 찾아내고 만 것이다. 그녀는 사업장을 기웃거리는 나의 모습을 CCTV로 보고 기겁한 듯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 그리고 그녀가 저녁을 사겠다며 민물장어집으로 안내했다. 나는 계속해서 주도권을 빼앗긴 채로 있었다. 그 저녁식사는 관계 회복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정식으로 결별 의식을 치르기 위하여 마지막으로 결행한 것에 불과했다.
"이건 제가 당신에게 차인 거예요."
그녀는 '나보다 더 신실한 사람이 어울리는 것 같아'라는 폭탄 발언에
구체적인 답을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일종의 끊어내는 수순에서 나오는 어법이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너무나 어이없는 선언을 하는 그녀에게, 나는 차마 반박을 하지 못했다. 모든 사단은 나로 말미암아 시작되었으니.. 아울러 그녀의 태도에서 움터 나오는 범접할 수 없는 우주의 기운에 의해 나의 혀와 입술이 저당 잡혀 버렸다. 마치 그녀가 초능력을 부리는 듯했다. 사람들이 함께 식사를 하는 대중음식점 바닥에 무릎 꿇고 용서를 비는 퍼포먼스도 하지 못했다. 당연하지. 소심한 A형 남자인데..
나의 아둔한 두뇌 속 뇌신경은 그제서야
<그녀가 한 번 아니다 하면 그건 돌이킬 수 없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라며 나에게 '긴급 타전'하고 있었다. 풀리지 않는 매듭처럼 나는 내가 결별 통고를 받았다 생각하고 있고, 그녀는 헤어지는 마당에 자기가 차였다고 선언하고 있었다. 그렇게 차임 당한 여자가 저렇게 당당할 수 있나?
생각해 보면 당시에 나는 초능력과 사랑,
두 가지 선택지 중 사랑에 올인했었다. 연애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사랑을 성취하기 위해 시리우스 별의 염력을 사용하기를 포기했었던 것이다. 만약 사랑을 선택하지 않고 초능력을 사용했더라면 나는 그녀를 차지하고 지배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지금 그런 궁리질하면 무엇하리. 다 지나간 일인데.. 지금은 그녀의 염력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일까? 헤어진 지 3년이 지나가도록 엽(葉)은 아무런 연락을 해오지 않고 있다.
계절이 바뀔 때면 어김없이 내면의 자아에게 반문하곤 한다.
오얏나무 이파리는 지금도 바람에 흩날리고 있을까?
'엽(葉)'은 지구별 Y시에서 아무리 쌉싸름하게 팔랑일지라도,
그날의 무지렁 했던 한 그루 '나무'는
초능력마저 빼앗겨버린 채 메마른 세상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묵묵히 한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여행이 정지당한 여행자처럼.
그럼 '이파리'는?
나는 물기 머금은 눈망울로 중얼거렸다.
"그래, 이파리는 바람에 팔랑이다가 떨어지고 썩어져도 새봄이 도래하면 다시 저 맑은 대기를 향해 푸른 싹을 틔울 수 있겠지. 지구별에서 이파리는 수만 번 죽고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존재니까 얼마든지 다시 매력적으로 부활할 수 있어. 사랑스러운 이파리.. 그러나 나무는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해. 바보처럼... 그게 이파리와 나무의 운명이겠지..."
나는 운명을 신봉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지구별에서 절대 행운을 기대하지 않는 고지식한 여행자이다.
하지만 지구별의 여러 나라를 여행했지만 이상한 나라 K국처럼 힘든 여정은 다시없었던 것 같다. 단지 가능하면 빨리 <K> 나라 여행이 마무리 지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품고 있을 뿐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상한 나라 K에서 나를 기쁘게 해 줄 사람은 오직 하나, 엽(葉)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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