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th Korea Story

제2장 Y시에서의 한철 / 5 - 1박2일 여행

hittite23 2025. 4. 24.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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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리씽> 카페에서 '돌싱의 일상'이라는 카테고리에 글쓰기 시작한 것은 앞에서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여행자에게 <K> 나라는 하나의 경유지에 불과하였다. 부초 같은 존재는 여행지에 뿌리를 내릴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여행지의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지닌 토착화된 형질에 나의 성향을 믹싱 한다는 것은 성공하기 어려운 미션이었다.

 

나의 무의식에 잠재한 속마음은 달랐을는지 모르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내세울 수 있는 이유는 그리했다.

그래서 카페 리씽에 글 쓸 때 일상의 이야기를 편하게 풀어놓을 카테고리를 찾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상당히 조심성이 많은 존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가 이곳 <지구별>을 스스로 여행지로 선택해서 찾아온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아니 어느 날뿐 아니라 모년 모월 모시 나는 불현듯 이곳 지구별로 낙하했고, 그중에서도 복잡한 정세에 인민들 심기가 불편하기 그지없는 꼬레아로 꼬나 박은 셈이니까. 그러니 조심조심 조오심해야 했다. 눈먼 아이처럼.. 귀 먼 아이처럼..

 

그렇게 하여 내가 골라낸 가상의 장소는 '돌싱의 일상'이었다.

그곳은 카페 안에서도 비교적 한산한 길모퉁이에 자리 잡은 기찻길옆 오막살이 같은 곳이었다. 뭐, 기차 소리 요란해도 인적은 드문드문 한적한 곳이 틀림없었다. 생각해보니, 내 입장에서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여행의 동력을 잃지 않는 장치도 필요했었다. 그리하여 도란도란 이야기 나눌 상대가 없어진 나는 수시로 김기덕 영화처럼 겉사람과 속 사람을 백일하에 끄집어내어 서로 간의 대화를 나누곤 하였는데 그 결과물을 키보드로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구별 인간 종자들에게 먹힐까?'

그런 의구심을 떨칠 수 없었지만 꼭 신경을 써야할 사안은 아니었다. 익명의 존재들이 살고 있는 가상의 공간이기 때문에. 그리하여 기차소리 요란해도 나의 글쓰기는 가열찬 궤적을 밟아 나갔다. 그곳에 사유의 편린과 궤적을 조각해 내면 거짓말 같은 치유의 기쁨을 얻을 수 있었다. 글 올리는 자체가 즐거워서 심지어 하루에 두세 번 쓰는 날도 있었다.

 

그 때문이었을까?

엽(葉)이 나의 끄적거림에 댓글을 달았을 때 나는 그녀를 첫눈에 알아보지 못했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하나라 여겼던 것이다. 뭐, 그런 인간들이 비일비재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돌싱의 일상' 밖의 리씽 카페 내 다른 카테고리로 마실 나갔다가 나는 엽(葉)의 아이디로 올라온 그녀의 글흔적을 발견했다. 어? 이 아이디 <좋은걸>은 나의 글에 댓글 달았던 여자 생명체가 아니던가. 나는 글자의 바다에 떠다니는 그녀의 흔적을 하나씩 둘씩 그물로 낚아채 올렸다.

 

대부분 짤막짤막한 글이었지만 깔끔하면서도 눈에 쏙쏙 들어오는 이야기들이 점점이 떠다니고 있었다. 제일 처음, 그게 내 마음을 매료시켰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이후부터 나는 몸속으로 들어가서 은신하고 있던 모든 촉을 풀가동시켜 그녀의 글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뭘 하려고? 당근, 흡입하기 위함이었다.

야미야미 얌냠냠..

종이를 씹어 먹는 흑염소처럼 나는 그녀의 글을 먹어치웠다.

첩보에 따르면 그녀는 나에게 첫 댓글을 달기 달포 전 카페에 입성한 신입회원이라고 한다.

 

신분이 신입회원이라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하였다.

음, 그건.. 돌싱에게 어울리지 않는 표현일지 몰라도 때 묻지 않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처음 그녀의 댓글로 카페에서 안면을 텄지만 마실 나간 카테고리 안에서 그녀의 흔적을 발견한 이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이, 아니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이, 아니 아니 철가루가 자석에 무작정 끌려가듯이 나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기울어졌다.

 

나는 그녀의 글에 댓을 달았고 그녀의 대댓이 달리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오막살이 옆으로 기차는 쉬임없이 달려갔다. 닭여왕이 탄 초특급기차도 지나갔고, 최순실이란 여자도 타고 갔다. 우수석도, 최순실의 딸이 말 타는 유럽으로 쫓아다닌 국개의원도, 반복되는 광화문 촛불집회 뉴스가 반딧불이처럼 명멸하며 달려가고 달려오며 기적소리 꽥꽥 내질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오막살이 아기는 잠만 잘도 잣다. 나는 이를테면, 카페 글쟁이로 치면 갓난아기에 해당하는 존재였다. 

그렇게 잠만 잘 수 있었던 것은 내가 관종화 되어가든가 아니면 어떤 서막이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카페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그녀의 흔적을 찾아다녔으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타인의 글에 달린 그녀의 댓글까지 살피게 되었다. 무슨 말을 남겼는지, 그 말의 속뜻이 무엇인지, 찾아보고 해석하는 것이 일과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결단코 관계를 발전시키려고 무리하지는 않았다.

나는 연인사이에서 발생하는 사랑의 역학을 고려한 밀당의 고수가 될 수 없었다. 단지 여행이 주특기인 여행남이었으며, 바이블을 포함하여 주워들은풍월에 따라 세상의 모든 일은 때와 정한이 있음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그렇게 <히타이트 21>로 살면서 <좋은걸>이었던 그녀와 1년의 세월을 보냈다. 말이 1년이지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대단한 인내심이었고 위험한 기다림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지나도록 지켜보기만 했다니...

 

하지만 1년의 세월 중에서 계절이 세 번 바뀌면서 나는 이상한 징조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그건 환절기에 움터나던 성적인 욕망과 다른 섹슈얼한 조짐이었다. 그녀가 다른 횐과 친분 맺을까 염려하는 마음이 싹튼 것이다. 소심한 A형이라서 그랬나? K국에서는 코로나 19 이후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람의 성향을 판별하는 새로운 테크닉인 MBTI가 유행처럼 번졌지만 나는 벌써 지구별 여행자로서 연식이 쌓여가고 있는 터인지라 혈액형 판별법에 더 익숙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차게 고백하지 못하는 성정, 사랑하는 여자에게 속마음 표현하는 일에 서투른 남자.. 그건 여행지 <K> 나라 신문에서 읽었던 인간 분별법 중 A형 남자와 일치하는 행동거지였다.

 

징조에 시달림과 동시에 나는 스스로 A형 남자인 것을 한탄하였다. 그럴 때마다 내심으로는 도리질하며 단도리쳤다. 그녀는 어느 정도 관심을 주고받는 지인이자 댓글 우의를 다져왔던 사람, 희미하게나마 썸 타는 사이였으므로 다른 남자와 친교 나눌 리가 없다고 결론 내렸다. 아니 나혼자 그렇게 우기며 시간을 보냈다.

'만약 딴 남자에게 한 눈 파는 여자라면 나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녀를 보내 주겠어. 그러는 게 서로의 정신 건강에 좋은 것 아니겠어?' 그렇게 속 사람에게 말하며 자기 최면을 걸었다.

나혼자 김칫국 마시며 난리 부루스를 쳤던 것이다.

 

해가 바뀌어 겨울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하늘을 향해 영적인 기도를 지속하던 나목의 몸통에 물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정착촌 S시의 근린공원에서 건조하게 메말라 있는 나뭇등걸을 바라보며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나무인간을 떠올렸다. 시리우스에도 나무인간의 나라가 있었다. 히타이트 21은 카페 세상에서 글쓰기 할 때, 시리우스인의 전생을 가진 인물로 포장하였다.

그랬다.. 나는 시리우스인 답게, 시공간을 휘어지게 하여 미래의 그녀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지구별 수컷들의 상상을 뛰어넘는 시리우스식 암컷 보쌈의 마각을 드러내었다. 전우주적 노하우를 풀어놓았던 것이다. 시리우스별의 연애철학 <데꼬 보꼬론>을 설파한 것도 그런 작업의 일환이었다. 그리고나서 남녀가 만나서 하나 되는 담론을 지구별 여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모니터링했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간..

나는 솔로이지만, 미래에는 분명 나의 짝이 만들어져 있을 터인데..

나 그때까지 기다리는 게 힘들어 시간을 끌어당기고 공간이 겹쳐지게 하였으니,

미래의 당신께서 지금 나에게로 와주세요..'

그렇게 익명의 세계에 존재하는 여자 생명체들을 향하여 뚜루루 뚜루~ 모스 부호를 송출하였다.

 

반응은 의외로 뜨거웠다.

내막을 알지 못하는 <K> 나라 여인들이 경쟁하듯 내가 올린 글에 댓글을 달았다. 조금 남부끄럽게도 나의 연애 행각에 응원 보내는 남성 회원도 생겨났다. 아, 이게 머선 일인지...

사이버 세상에서 알지 못하는 상대에게 그리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일 텐데..

동성 남자 - 지구별 수컷 - 들이 보내는 반응을 보며 나는 시리우스 별에서 행사하던 초능력이 어느 정도 먹히고 있다고 착각에 빠지기까지 하였다. 결정적으로, 어떤 초딩 여선생은 나에게 연서를 보내오는 것이 아닌가!

 

.......................

 

화사한 <블루>입니다.

 

방금 님의 블로그에 다녀왔어요

방명록에 블루라는 이름이 남아있겠네요,,

카페 글들을 찾아 읽을 때만 해도,,자기의 생각을 다양하고 진솔하게 풀어나가시는 분이구나 했는데..

방금 블로그 다녀오고 나서는..

음 장난이 아닌 걸?,,,이라는 생각,,

살아온 나날들을 그렇게 남기고,,꾸리기 만만치 않은데..

좀 놀라웠어요,,

<마음을 나눌 수 있을까요>,,,라고 손을 내밀고 시작하려고 했는데...

히타이트님의 마음에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서,, 제 마음이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님의 프로필은 글을 읽으며 대충 알아서 짐작,,,

가족관계 나이,, 좋아하는 것,, 등등,,

제가 끌림과 관심을 가진 이유는,

처음에,, 그림이 보기 좋았어요. 고흐의 그림이,,

그다음에 지역적인 이유(가까워서요)--공항 근처,, 전 목동이거든요.

딸 둘이라는 것과, 저도 둘,,, 딸 한 명이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것,,(우리 큰 딸도,,,,)

그리고 글 속에 묻어있는 생각들이

대화 나누고 마음 나누기 좋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네요

전 66년생,, 직장 다니고요,,24년 오직 외길 인생, (달인이죠)

초중고대학교 모두 서울,,, 84학번입니다

혼자된 지 얼마 안 되었고요,

 

그냥 히타이트 님이 계시는 그 길로 첫걸음을 디뎌 봅니다.

계속 걸어갈 수 있을지,, 되돌아올지,, 쉬어갈지 모르지만

일단은 걷고 싶은 길입니다.

같이 걸으실래요?

 

.........................

 

 

여선생 <블루>에게는 미안하지만

당시 내 마음은 오직 한 사람, 엽(葉)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미래의 당신, 엽(葉)에게 내가 보내는 메시지를 읽고 우리 사랑이 맺어질 때까지 기다려 달라는 암시를 보내고 있었다. 지구별 여인들은 수컷보다 촉이 더 발달하여 내가 보낸 텔레파시를 충분히 감지하리라 믿고,

'히타이트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어요. 당신 마음의 문을 여는 날이 올 때까지..'

그렇게 텔레파시를 보내고 또 보냈다.

한편으로 그녀의 마음이 여전히 우호적이며, 긍정적임을 행간 읽기를 통해 숙지하고 있었다. 그게 나혼자 착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 나는 과감한 베팅을 시도했다. 그녀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고, 마침내 연락처를 받아 내었다.

 

지구별에서 '통신망의 개통'이란?

시리우스 별에서 밥 먹듯 행하던 초능력이 효력을 발휘하는 순간이었다.

작업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은 아마도 그녀를 지켜보았던 1년간의 기다림에 대한 그녀의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이심전심.. 텔레파시로 그녀와 나는 통했던 것이다.

 

통신망 개통 이후 작업의 수준은 '문자'에서 '음성'으로 레벨 업 되었다. 대개의 경우, <K> 나라 여성들은 한번 통신망 개통하는 것이 어렵지 연결통로가 만들어지면 일은 의외로 쉽게 진척되는 경향이 있었다. 나는 음성으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였고, 점점 더 그녀에게 다가감을 느꼈다. 문자와 음성.. 그 이외의 정보로는 얼핏 보았던 사진 한 장뿐. 그녀가 자신의 프로필에 흐릿한 사진을 올려놓았다가 날파리가 꼬여드는 단초가 되었던지 금방 지워버렸는데 운 좋게 나는 그것을 목격한 것이었다. 나는 선명하지 않은 사진으로나마 그녀의 인상과 분위기를 읽어낼 수 있었다. 시리우스인의 전생이 있는 자인데 당근..

'음.. 충분히 만나 볼 가치가 있는 여자 같아.'

나는 그런 기대 심리를 마음에 담아도 되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렇게 정분을 쌓아가는 와중에 그녀가 불현듯 전화로 말했다.

"인기가 많아서 좋겠어요."

나의 글에 달리는 뭍 여성들의 댓글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나는 그녀 심중에 질투심이 유발되고 있다고 알아차렸지만 짐짓 모른 체하였다. 그러다가, 적당하게 뜸이 들었다고 판단되었을 때, 느닷없이 생뚱맞은 제안을 하였다.

 

"아.. 이젠 우리 서로가 한 번은 만나야 할 시점이 되었어요. 내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끌림을 주는 사람인지, 내가 쓰는 글과 실물 간의 괴리감이 더 커지기 전에 당신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 내렸어요. 엽(葉)님, 우리 만납시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말했다.

"나무님, 어서 오세요, 두 팔 벌려 환영하겠어요."

핸드폰으로 전달되어 오는 그녀의 음성은 나를 VIP(귀인)로 초빙하는 초청장 같았다. 사실 그녀의 반응 '두 팔 벌려 환영'하다는 표현은 예수가 나귀 타고 어느 읍성(예루살렘인가?)을 방문할 때 나무들까지 두 팔 들고 환영하였다는 성경 이야기를 패러디한 것이었다. 이상한 나라 K에는 첫 단추를 잘 꿰어야 일이 잘 풀린다는 속담이 있었다. 실물 세계에서 그녀와 연애를 시작하면서, 나는 금단추가 달린 연미복을 입는 착각이 일었다.

 

이미 마음은 헬륨가스로 채워진 기구처럼 하늘 높이 두둥실 떠올랐다.

초대받은 남자는 약속한 날 저녁 철공소 체험여행 연수지인 D시에서 그녀가 거처하는 Y시로 달려갔다. 반도의 옆구리를 수평으로 이어주는 국도는 심하게 꼬불거렸다. <K> 나라 여행 중 그렇게 꼬불꼬불한 길은 처음이었다. 나에게 있어서 Y시는 처음 방문하는 도시라는 사실, 처음 달려보는 꼬불거리는 길, 처음 만나는 미지의 여인.. 몇 가지 키워드가 버무려져 나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추적하는 탐정 가제트로 빙의된 듯했다. 그렇게 <K> 나라 여행자 걸리버는 구부러진 길을 따라 잎사귀 팔랑거리는 숲 속의 앨리스를 만나러 갔다.

 

오마나...

Y시의 앨리스는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예쁜 얼굴에 눈빛까지 반짝반짝거리는, 별처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세상의 모든 첫 땡땡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동을 준다. 나는 엽(葉)을 처음 만나던 날 연애소설 주인공이 된 듯 붕 떠다니는 느낌적인 느낌을 느꼈다. 그날은 주중이었고, 나무 요일이었다.

지구별 여행자 나무(木)는 이파리(葉)를 만나기 위해 봄이 오는 들판을 내달렸다.

철공소 연수 일과가 끝나자마자 연수지에서 무상으로 제공해 주는 식사도 마다하고 차를 몰아 Y시로 날아갔다. 싱그러운 봄바람이 살랑거리며 길가의 나뭇잎을 희롱하고 있었다.

 

여행자 나무는 마침내 사랑스러운 그녀와 조우했고,

그녀가 인도한 호젓한 식당에서 가슴 벅찬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친 후엔 길모퉁이 찻집으로 자리를 옮겨서 아름다운 담소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 '이파리'는 바람에 살랑대는 젊은 잎사귀처럼 끊임없이 재잘거렸다. 남편과 헤어진 사유만 빼고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비율빈에서 벌였던 학원사업의 에피소우드를 포함하여 최근에 접근해 왔던 찌질한 돌싱남의 대시에 이르기까지.. 마치 오래된 절친을 만난 듯 즐겁고 행복한 수다를 떨었다.

 

결국 나무 씨는 이파리양의 언변에 이끌려 달빛이 가는 길을 좇아 노니다가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D시로 복귀할 수 있었다. 야밤의 데이트를 결행하기 위하여 도시와 도시를 넘나들었지만 나무씨는 조금도 피로한 줄 몰랐다. 일찍이 <K> 나라 선배 여행자 중에는 하룻밤에 아홉 번이나 강을 건넜다는 분도 있잖은가.

 

이후 그녀와 나 사이에 피어난 신초록의 싹(썸)은 푸르른 사랑으로 성장했다.

사탕수수밭이나 와인 밭이 끝없이 펼쳐지는 동네에서도 연애의 시작은 신초록이었을까? 이곳이 모제르 강변이라면 나는 그녀를 와인 밭으로 끌고 갔었겠지. <K> 나라에서 나는 구릉과 구릉이 손잡고 나들이하는 듯한 반도의 옆구리 지경을 엽(葉)과 함께 순례하듯 돌아다녔다. Y시 인근에 산재해 있는 O시와 A시에 흐드러지게 족적을 남겼다. O시에 소재한 O대학 교정으로 차를 몰아 단단한 가지가 거침없이 뻗은 커다란 나무 밑에서 그녀를 껴안고 키스를 나누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의기투합하여 1박 2일 여행을 도모하게 되었다.

 

1박 2일의 여행..

그것은 지구별 K국에선 매우 중차대한 의미를 내포한다. <K> 나라에서는 아무 하고나 1박 여행을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낙점된 여행지는 비탈이 아름다운 강원도 지경. 나는 춘천호-남이섬-레일바이크 순으로 여정을 짰고, 당연히 그녀의 승인도 얻었다.

 

<K> 나라에서 1박 2일 여행이란 같이 살아보는 연습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서, 1박 2일 여행의 승낙은 그녀가 합방 혹은 나와 2층 짓기로 마음먹었음을 의미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나는 첫 소풍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그날의 도래(到來)를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대기의 신이 시샘한 것일까? 첫 여행을 결행하기 일주일 전 K국 기상대로부터 우울한 예보가 공표되었다. 그 기간 강원도 지경에 강한 봄비가 흩날린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아.. 나는 빛나는 태양 아래서 화사한 여행을 꿈꾸었는데..

 

엽(葉)은 그런 사정을 예감하지 못한 듯 여행지에서 어떤 속옷을 입을까 요모조모 따져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사랑스러웠고 나는 마치 그녀의 남편이 된 느낌이 일었다. 실제로 그녀는 <여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하였다. 그러므로 그녀는 마음으로 이미 나에게 몸을 허락한 사이나 다름없었다. (요런 맹추 같은 착각이라니..)

 

그녀가 <여보>라고 부를 때 나의 몸에서는 엔돌핀이 팡팡 터져 나왔다.

그럴 때 좀 더 긴장했어야 했는데..

내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를 다잡았다고 방심하는 어부처럼

나는 그녀를 내 여자로 단정 지어 안일하게 처신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합방에 목매달지 않는 대범한 남자로 보이려고,

날씨가 좋지 않으니 강원도 여행은 다음으로 연기하자고 제안하고 말았다.

 

엽(葉)의 반응은 명쾌했다.

그녀는 오랜 기간 아랫사람을 부려 온 CEO였었고, 그런 경력은 그녀를 판단과 결정의 여왕으로 만들었다. 경영자로서 엽(葉)은 생산적인 일에 관심이 많지만 결코 모험을 감행하지 않는 타입이었다.

 

"저는 안전빵을 좋아해요"

그렇게 자신의 경영철학을 요약하던 그녀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다.

안전제일의 여인은 첫 여행을 연기하자는 나의 제안에 순순히 응하였다. 아쉽거나 섭섭해하는 표정이 드러나지 않았는데, 쿨한 그녀의 반응이 오히려 나를 실망시켰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만 동의하면 비가 와도 여행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니 여행을 미루자"

이러한 나의 제안은 이를테면 그녀에 대한 배려심에서 발설한 일종의 립 서비스와 유사했다. 반면 그녀는 여행 연기를 요청하던 그 순간 나를 완전히 아는 사이라고 결론 내리지 아니하고,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다가오는 과정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응, 그러니?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지 뭐..' 이런 속마음이었으리라...

 

후일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내가 햇살에 따라 궤적을 바꾸는 해바라기였다면 그녀는 비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비가 오니 여행을 연기하자는 나의 제안에 그녀는 다른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강원도 지경으로 부릉부릉 여행 떠났다가 비가 오면 차창에 내리치는 빗줄기를 쳐다보며 하염없이 이야기꽃 피워도 좋다고 생각했을 수 있었다. 나의 초능력이 어찌 그런 중요한 포인트를 놓쳤는지.. 나는 그것도 캐취 하지 못한 채 잘못된 제안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어찌 그녀와의 결별이 그 일 때문이었겠는가 마는

실패의 씨앗은 그때 뿌려졌음이 분명했다. 쌉싸름한 '이파리'는 촉촉이 내리는 빗물에 발가벗은 몸을 내어 맡기고 싶어 했지만 몽매한 '나무' 한 그루는 광합성의 시간을 가지려 햇살 쨍쨍한 날을 욕심내었다. 따라서 사랑이 깨진 것은 순전히 날씨 탓이었다. 비와 햇살은 멋진 이중주를 연주할 수 없으므로.. 내가 햇살을 원했으면 그녀로하여금 해바라기가 되도록 만들었어야 했다. 아니면 내 스스로가 빗물이 되는 것을 감수하던가. 그리하여

'이러려고 여행을 연기했나?'

라는 한탄이,

2월 하늘 가득 메아리 되어 울려 퍼져나갔다.

 

 

아,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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