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uth Korea Story

제2장 Y시에서의 한철 / 7 - 검은 염소의 눈망울

hittite23 2025. 4. 24. 20:18
반응형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계절의 수레바퀴가 놀이동산의 메리 고 라운드(Merry-Go-Round)처럼 정신없이 돌고 돌았다.

<K> 나라의 수첩공주는 우주의 기운을 모아 주술을 부리며 요망한 여인을 푸른 기와집에 들이다가 대중의 분노를 얻어 권좌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공주가 감옥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는 동안, 달빛 신사가 새로운 권력자로 등장하여 <K'> 나라의 손자 돼지와 센세이셔널한 만남을 성사시켰다. 섬나라처럼 고립되어 있는 <K> 나라가 대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도보 다리 하나를 <K'> 나라 지경에 걸쳐 놓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여행자에게 있어서 <K>-<K'> 라인은 여전히 봉쇄된 채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는 상태였다.

세월은 때로 무섭고 잔인하게 흘러간다. 가는 세월을 잡을 방도가 없자, 어느 날 겉사람 목(木)은 자신의 마음 들판으로 잠입하기로 작정했다. 그 세계를 관장하는 마음의 지배자 <히타이트 21> 대왕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손자 돼지와 달빛 신사가 조우한 것만큼이나 놀라운 사건이었다. 그렇게 내면의 세계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평생 겪어보지 못한 목(木) 꼰대의 출현으로 마음 들판에 근무하는 병사들은 정신 못 차린 듯 우왕좌왕하였다.

 

'야야, 목(木) 꼰대가 나타났어, 이게 대체 웬일이냐!'

수군거림과 웅성거림이 들판을 가득 메웠다. 목(木)은 짐짓 못 들은 체하며, 장닭 각하의 충견 전대갈이 빛고을에서 그리했듯이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그들을 자빠트려 마음의 들판을 평정했다.

'뭐, 별거 아니군. 초전 기습공격이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경우가 많긴 하지.'

내면의 세계로 잠입하는데 성공한 목(木)은 그렇게 뇌까리며 중심 대로를 뚜벅뚜벅 걸어가 마침내 속 사람 히타이트 21을 만났다. 목(木)과 히타이트 21은 서로를 예우해 주는, '내가 곧 너'이고 '네가 곧 나'인 특별한 사이였다.

 

시리우스에서는 삼위일체의 하나님 같은 신비로운 생명체를 더러 목격할 수 있었다.

'어쩌면 나도 그런 존재였는지 모르지. 지금 지구별에서 2위 일체로 처세하잖니.'

이를테면, '겉사람과 목'과 '속사람 히타이트 21'로 구성되어 있는 지구별 여행자는 삼위일체 하나님보다 조금 아래에 속하는 능력자였다. 암튼, 마음 들판에서 히타이트 21을 만난 겉사람 목(木)은, 시아파 이슬람 지도자가 그의 형제국에게 거룩한 전쟁의 동참을 부탁하듯, 마음의 지배자에게 뜻밖의 요청을 하였다.

 

"나는 지금 K국 여행을 마치고 원숭이국으로 출국할 작정이야. 그전까지 Y시로 들어가는 모든 도로를 통제하여야겠어. 사방으로 연결된 길목마다 특수 헌병들을 배치해 줘. <계엄>을 선포한 것이라고 봐도 좋아. 이제 다시는 그곳을 방문하는 일은 없을 거야. 네가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너무 아픈 여행은 여행이 아니었으므로..."

 

마음 들판의 관장자 히타이트 21은 목(木)의 요청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속사람인 그는 속마음으로 마뜩잖은 상념을 떠올리고 있었다.

'<계엄령>이라니?'

'이처럼 평화롭고 조용한 마음 들판에 그런 가혹한 조치를 내려야 할 이유가 고작 그거?'

 

한편으로 목(木)은 미약하게 남아있던 초능력마저 마음 들판 잠입하는데 소진해 버린 상태였다.

이제 염력을 사용하지 못하는 껍데기만 남은 처지라 히타이트 21이 거부하면 마땅히 취할 방도가 없었다. 그런 내막을 잘 알면서도 서로 <니꺼내거내꺼내꺼>인 사이인지라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침묵하던 히타이트 21은 결국 목(木)의 요청을 들어주기로 결심한다.

 

"그래, 너의 뜻을 받아들일 게. 근데 약속해 줘. 이곳 세상에서 다시는 리플리를 만나지 않겠다고.."

목(木)은 반색하며 답하였다.

"당근이지, 내가 요청하는 것도 그런 의중에서 출발한 건데.."

 

그런데 마음 들판의 세상은 겉사람 목(木)이 활보하는 지구별과 다른 시계가 작동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구별의 하루가 지나갔다.

목(木)이 마음 들판에 잠입한 지 반나절이 채 지나지 않았는데 지구별은 벌써 2013년에서 2018년으로 시간이 흘러가버렸다. 목(木)은 히타이트 21과의 거사를 성사시킨 후, 마음 들판을 떠나기 전에 6년 전 진한 애정을 품었던 리플리(Leaf Lee)에게 한 번 더 카톡 문자로 진심을 떠보기로 했다.

 

'왜? 무슨 목적으로? 히타이트 21과의 약속까지 했으믄서...'

암튼 문자는 톡으로 날아갔다.

 

사랑하는 엽(葉)아

나는 너와 연애하던 시간들이 바로 어제 일처럼 생생한데, 너는 나를 잊은 거니?

정녕 나를 잊어버렸단 말이니...

(지구별 시간 2018.3.6. 화 13:31, 목으로부터)

 

아...

이건 아니죠.

저는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시간입니다.

이러지 마세요.

스스로의 감정은 알아서 처리해야 되는 거 아니겠어요.

이런 톡 아주 피곤합니다.

답장도 안 했으면 합니다.

(지구별 시간 2018.3.6. 화 13:48, 엽이가..)

 

Y 시에서의 마지막 저녁식사 후

한 번도 카톡에 응하지 않던 리플리로부터 뜻밖의 답장이 왔다. <사랑한다>라는 과격한 표현이 그녀를 자극시켜 아주 오랜만에 답장을 받아보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이내 목(木)의 미간은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건 아니지 않은가.'

결국 목(木)은 장문의 카톡을 텔레파시 송출하듯 그녀에게 날려 보냈다.

 

알겠습니다.

나는 당신이 왜 나를 뿌리쳤는지 알 수가 없었어요.

내가 납득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벌써 감정 정리했을 것입니다.

 

지금 당신이 생각조차 하기 싫은 시간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너무나 뜻밖이군요.

당신과 마지막 식사 이후에 내가 한 일방적인 행동 때문인지

아니면 당신과 결별하기 전에 그런 감정을 가졌는지 의문입니다. 나는 끝내야 하는 사이라면

깨끗이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나도 그리 처신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납득할 수 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어요.

내가 당신에 대한 마음 정리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으신 거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당신을 피곤하게 할 마음으로 톡을 보낸 건 아닙니다.

나도 언제까지 이런 상태로 지낼 수 없으므로 당신의 진심을 알고 싶은 마음에서

과격한 톡을 보낸 겁니다.

사실 나는 당신이 블로그에 들어와서 내가 올린 비댓을 읽고 간 것도 알고 있고,

그럼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는 당신의 처신을 보며 당신에 대한 미련을 조금씩 지워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를 비하하거나 비난하거나 멸시하여도 크게 화내지 않을 겁니다.

왜 내가 싫어졌는지 아니면

나랑 사귈 때에도 사랑하는 마음이 아니면서 마지못해 만나다가

아니다 싶은 어떤 순간의 어떤 판단 때문에 나를 밀어낸 것이라든지

그냥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말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 이유뿐입니다.

 

당신은 나와의 사귐이 기억하기 싫은 추억으로 남아 있다고 하시는데,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게 팩트라면

저는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정도의 매너는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당신과의 인연은 인생에서 중요한 겪음으로 남아 있기에

헤어져도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어정쩡하게 결별했으니까요.

그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당신은 그 조그마한 바램조차 수용하지 않으실 건가요?

(지구별 시간 2018.3.6. 화 14:07, 목으로부터)

 

하지만 그가 보낸 카톡 문자는 계속 1을 보여주며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지구별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가기 전에 다시 바깥세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

다시 쳐다보아도 카톡 문자 옆의 1의 숫자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바깥세상에선 코로나19가 외계인 지구 침공처럼 엄습해 와서 모든 비행기의 이착륙이 통제되고 있었다. 벌써 지구별 시계는 2019를 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목(木)은 목구멍에 가시가 돋은 듯 칼칼함을 느꼈다.

안구의 스크린에 <K> 나라의 명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심은하가 돌아오지 않는 한석규의 사진관을 향하여

거칠게 짱돌을 집어던지는 장면이 오버랩되었다.

그때, 설상가상으로

'시간의 문이 닫히기 전에 빨리 떠나셔야 합니다.'

라는 수행비서의 긴급 타전이 날아왔다.

마음이 다급해진 목(木)!

순간적으로 들고 있던 아이폰을 Y시 쪽 공간을 방호하며 쳐놓은 유리막 상단을 향하여 세차게 집어던져버렸다.

 

쨍-

얼음판이 깨지듯 공간에 20 꼭지 형태의 금이 가기 시작했다.

Y시를 향한 공간에 360도 방위로 회색 금이 쭉쭉 뻗어 나왔고 그 중심점에 매달린 듯 아이폰이 정지해 있었다.

 

그것이 내가 마음 들판을 떠나오기 직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면도날로 잘려진 것처럼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지금,

나는 어느 철길 옆 차단기 기둥에 묶인 염소가 되어 있다.

 

 

..................................................

 

 

차단기 기둥 곁에서

서대경

 

어느 날 나는 염소가 되어 철둑길 차단기 기둥에 매여 있었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염소가 될 이유가 없었으므로, 염소가 된 꿈을 꾸고 있을 뿐이라 생각했으나, 한없이 고요한 내 발굽, 내 작은 뿔, 저물어가는 여름 하늘 아래, 내 검은 다리, 내 검은 눈, 나의 생각은 아무래도 염소적인 것이어서, 엄마, 쓸쓸한 내 목소리, 내 그림자, 하지만 내 작은 발굽 아래 풀이 돋아나 있고, 풀은 부드럽고, 풀은 따스하고, 풀은 바람에 흔들리고, 나의 염소다운 주둥이는 더 깊은 풀의 길로, 풀의 초록, 풀의 고요, 풀의 어둠, 풀잎 매달린 귀를 간질이며 기차가 지나고, 풀의 웃음, 풀의 속삭임, 벌레들의 푸른 눈, 하늘을 채우는 예배당의 종소리, 사람들 걸어가는 소리, 엄마가 날 부르는 소리, 어두워져 가는 풀, 어두워져 가는 하늘, 나는 풀 속에 주둥이를 박은 채, 아무래도 염소적일 수밖에 없는 그리움으로, 어릴 적 우리 집이 있는 철길 건너편, 하나둘 켜지는 불빛들을 바라보았다

 

..................................................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Gregor Samsa)가 어느 날 딱정벌레로 변하고 말았듯이

여행자 목(木)은 밑도 끝도 없이 염소가 되어 차단기 기둥에 매였다.

 

꾸부정하게 엎드린 채 고개를 땅에 처박고 있던 염소는 편두통 증세를 느끼는지 앞다리로 머리를 긁적이며 눈을 치켜떴다. 철길을 가로막던 차단기가 올라가고 길을 건너가는 사람들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아마도 목(木)은 초자연적인 힘에 의하여 마음의 들판에서 튕겨져 나온 듯하다. 기독교에서 양은 <구원의 대상>, 염소는 <불사 지를 가라지이자 심판의 대상>를 상징한다. 붙잡혀 있는 짐승(염소)이 되어버린 것은 죄를 지었거나 꿈을 상실하였기 때문이리라..

 

검은 다리, 검은 눈과 작은 뿔을 가진 염소가 바라본 세상은 풀과 벌레뿐이다.

염소가 된 목(木)은 풀에 주둥이를 박은 채(어느 누구에게도 말을 걸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으므로)

앨리에에엠~ 앨리에에엠~

하며 울음소리를 낸다. 그때 철길을 건너가던 처녀애들이 힐끔거리며 쑤근쑤근 종알댄다.

'어머, 어머, 저 염소 우는소리 들어봐, 좀 웃기지 않니?'

'그래, 웃긴다 얘.. 건널목 이름이 앨리스라서 저리 우나 봐'

'그치, 그치 웃기지?'

 

염소가 된 목(木)은 고개를 들어 지나온 여행의 추억을 되새김하려는 듯

철길 건너편 불빛을 바라본다. 그러나 보이는 유의미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왕십리 똥파리 들판을 가로지르는 철길 위에 서 있는 건널목과 그 건널목에 설치된 차단기 만이 염소와 동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여행의 꿈이 박제당한 슬픈 짐승의 눈망울에 꿈의 실현을 갈망하는 마음이 어려 있었다. 염소가 된 목(木)은 그가 보낸 마지막 카톡(전달되었는지조차 불분명한)에서 마지막 문단은 차라리 쓰지 않았으면 좋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흑염소가 되어버린 목(木)은 다음 여행지인 원숭이국으로 떠날 기회를 차압당한 채

계속 K국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지금 이 시간 그가 고장 난 라디오처럼 읊어대었던 <마음의 여행>은 가능할까? 사유 17호는 아직도 이곳 왕십리 똥파리 들판의 철길을 지나가는 어느 버스를 타고 있을까?

 

이상한 나라에서 Y시로 여행하고,

다시 그곳에서 1박 2일의 강원도 여행을 꿈꾸었던 중첩된 구조는

다중 우주의 세계처럼 풀리지 않는 매듭이 되어 혼미하게 흐트러져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기찻길 옆 염소 울음소리 요란해도,

피융 피융

기차는 사정없이 잘도 달리기만 한다...

 

 

 

 

찌질히게 굴지마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