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Daughter

잊절과 핼러윈 사이에서 길잃다.

hittite23 2025. 3. 29.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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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nsive(수심, 걱정), c.1875 / Auguste Renoir 作

 

 

 

 

집에 돌아와서 나는 마트에서 둘째가 고른 장본 물품들을 꺼내 정돈했다.

나와 둘째 두 사람을 놓고 본다면, 뭐 재삼자이거나 아님 위에 계신 그분이 그리한다면, 비슷한 성향이니 좀 다른 성향을 드러낸다느니 하는 수준을 뛰어넘는 상황이 펼쳐진다. 어지르는 사람 따로 있고, 정리 정돈하는 따로 있다는 식으로..

하지만 솔까말 정돈이라는 게 뭐 별거 있나. 주섬주섬 챙겨서 냉장고에 칸칸이 집어넣으면 땡이다.

냉동고에 들어갈 건?

없는 것 같았다.

나홀로 노는 것처럼 그러는 사이, 둘째는 먼저 플라스틱 계란 꾸러미에서 알을 한 개 꺼내 기름으로 튀기는가 싶더니 매운맛 쇠고기 카레덮밥에 계란 프라이를 얹어 한 그릇 뚝딱 해치운다. 그리고 사온 홍시 한 알을 꺼내 먹고 다시 같이 사 온 바나나 한 알을 꺼내 먹는다. 평소 단감을 먹지 않던 둘째는 특이하게 홍시는 땡기는 모양이다. 나는 간단하게 씻고 헬스장으로 나갈 차비를 하였다. 매일 머리를 감는 남자인 나.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려고 하니 둘째가 어느새 머리를 감았는지 드라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너 어디 나가니?"

"네."

"혹시 너 놀러 가려고 휴가 낸 거 아니니?"

나는 그냥 가볍게 찔러봤다.

"아니에요."

둘째는 적어도 나에게 사기를 치는 자식은 아니었다.

큰 딸 역시 사기 치는 자식은 아니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큰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가지면서 뭔가 오픈하지 않는 것들이 생겨나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큰딸이 내비치는 그런 행동거지가 일반적인 풍경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하면 둘째는 거의 모든 걸 투명하게 오픈하는 편이다. 사귀는 남자 이야기들까지 다 한다. 그렇게 오픈하는 것은 아마도 평범한 가정에서 보편적으로 행하여지는 엄마와 딸 간의 우애와 소통이 둘째에게도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엄마 노릇을 결코 잘 해낼 자질을 가진 사람은 아니다. 경상도에서 나서 자란 나의 친부는 전형적인 가부장적 마인드로 평생을 살다 가신 분이다. 그뿐만 아니라 그 가부장적 성격을 가정에 뿌리내리려는 의도가 강하게 스며나와 당신과 함께 세상을 살아온 가족, 아니 좁혀서 자식, 아니 더 정밀하게 초점을 맞추어 나 자신을 돌아보믄 나도 모르게 전염되거나 혹은 오염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내가 아무리 엄마 노릇을 하려고 해도 나는 만족한 '엄마 대행'이 될 수 없는 놈이었다. 그런데 둘째에게는 그렇게 친구가 되고 멘토가 되어주는 따뜻한 마음씨의 보호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있어 평생의 짐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테면 나는 철이 늦게 들어,

딸이 학업을 마칠 때까지 그 긴 세월을 '나 홀로 괜찮은 아빠로 살아온' 어처구니없는 남자였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남은 인생이나마 딸과 함께 잘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마치 그렇게 명령내리는 하늘의 소리를 들은 남자처럼 중차대한 마음의 결의를 다지며 매일매일을 살고 있다. 그래도 잘 해내는 것은 아니다. 내가 행동으로 하는 일들이란 그런 마음을 다지고 다지는 것과 여전히 괴리가 있음을 본다.

딸은 나가고 나는 동네 헬스장에 당도했다.

그곳에서 웨이트와 싯업 운동을 마치고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이어폰을 아이폰에 연결하여 BBC radio 음방을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선 '큐큐파파-큐큐파파-' 이렇게 숨 쉬며 러닝머신과 놀 수 있는 수준이 못 되었으므로 나는, '헉헉핵핵-헉헉핵핵-' 거리며 빠르게 걷는다. 러닝머신 위에 서서 고독한 워커는 어떻게 시간과의 싸움을 이겨낼까 고민한 끝에, 그래, 방송에서 나오는 음악 10곡만 듣고 내려가야지라고 다짐한다. 헬스장에서 틀어주는 한국 가요 10곡 들으면 30분이 조금 넘는데 BBC 방송에서 나오는 팝송 10곡을 헤아리니 여성이든 남성이든 DJ의 멘트를 포함해서 45분이 소요된다. K-POP은 한 곡의 러닝 타임이 평균 3.5분이고 영국인이 듣는 팝송은 평균 4분은 되는 듯했다.

 

그렇게 세팅한 이어폰으로 팝송 두어 곡을 듣고 나니 BBC의 여성 DJ가 까불거린다. 애청자와 통화하면서 먼저 애청자와 대화를 마무리 짓고 새로운 애청자를 만날 때마다 할로? 인? 하며 인사하는 것이다.. 아.. 오늘은 핼러윈데이구나. 잊절(잊혀진 계절) 세대인 나는 이제 핼러윈도 알아야 사람 구실할 수 있는 세상을 맞이했구나. 딸은 핼러윈 세대지 아마? 그런 독백을 읊어대다가 불현듯 나는 의미심장한 추론을 끌어낸다.

 

'혹시 둘째가 오늘 핼러윈 데이라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쓰나미처럼 밀려왔다. 아파서 쉬는 게 아니라 핼러윈 데이라 쉬는 것일 수도 있었다. 추론인지 직관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떠올림인지 모르지만 암튼 생각의 파도는 쓰나미보다 더 크고 높이 다가온다. 대개의 경우 그리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나는 마음의 방벽을 단단히 곧추세워야 했다. 설마가 설사로 치환되는 개인기가 나에게는 있지 않은가. 그런 생뚱맞은 기대감을 품으면서 위에 계신 그분이 바라볼 때 헬스장에서 순간 길 잃은 듯한 형국이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액션 취할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냥 그런 추정을 머릿속에 떠올려 봤다는 것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니, 그러하니까 나는 평균 이하의 철부지로 인생 마라톤을 달리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초광속으로 적응해야 하는데..

 

그래. 오늘은 시월의 마지막 날이군..

옛날 내가 청춘일 때만 해도 기념할 만한 날이라곤 크리스마스이브만 있었는데, 이젠 시월의 마지막 날까지 기념일로 창안해 낸 현대 한국인들이다. 그리고 그 한국인의 후손들은 시월의 마지막 날을 '잊절'이 아닌 '핼러윈 데이'로 치환시켜 버렸다. 상황이 이지경이고 보니 나는 그럼 이날을 어떻게 기념해야 할지 결정장애가 일어나는 느낌이 일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아, 세상의 다른 나의 세대 남자들은 어떻게들 처신하며 살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궁금증이 스멀스멀 벌레처럼 기어 나오는 걸 본다.

 

 

Young Girl in Blue, 1882 / Auguste Renoir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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