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듀크대 의학박사 학위를 받은 이후, 세계적인 뇌의학 권위자이자 신경외과 전문의로 활동하고 있는
이븐 알렉산더의 저서 <나는 천국을 보았다>의 독후감이다.
알렉산더 박사가 진짜 천국을 보았고 그 풍경을 묘사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
내가 이 책을 고른 것은 아니었다.
단지 사후세계를 인정하지 못했던 의사가 어떤 체험을 통해 천국을 말하게 되었는지 궁금했을 뿐이었다.
과거의 어느 한가한 날, 광화문통 교보문고에 들러 이 책의 책갈피 여러 장을 뒤적이며 대충대충 훑어보다가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사서 읽어보기로 결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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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에겐 몸이 없었다. 적어도 평소에 내가 알고 있던 그런 몸은 없었다. 나는 그냥.. 거기에 있었다. 맥박이 뛰고 고동치는 그 어둠 속에. 그때 이것을 '태고의 공간'이라고 불렀을지도 모르겠다. (중략) 그때는 언어, 감정, 논리가 모두 다 사라졌었다. 나 몰래 나의 뇌를 점령해서 꺼버린 바로 그 원시적 박테리아들의 시절로.
(중략)
정확히 언제 일어난 일인지 말할 순 없지만, 어느 순간엔가 나는 내 주위에 어떤 물체들을 지각하게 되었다. 질척이는 거대한 자궁 안에 있는 뿌리 같기도 했고, 혈관 같기도 했다. 검붉은 색으로 빛나면서 그것들은 저 멀리 위쪽의 어딘가로부터 저 멀리 아래의 어떤 곳으로까지 뻗어 있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것들을 바라보는 나는 마치 두더지나 지렁이처럼 땅속 깊숙이 파묻혀 있으면서도 그 주위를 둘러싼 뿌리와 나무들이 얽힌 모체를 볼 능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중에 이곳을 떠올렸을 때 이것을'지렁이의 시야로 보는 세계'라고 이름 붙였다. 오랫동안 나는 이것을 박테리아가 뇌를 공격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뇌가 느낄 법한 기억의 일종이라고 추측했다.
(중략)
5장. 지렁이의 시야로 보이는 세계
나는 이 책의 방향성에 대해서 예단할 수 있었지만
(뇌 손상으로 7일 동안 임사상태에 있다가 회생한 경험담)
저자가 어떻게 천국을 보았다고 주장할는지 그 진실과 사실에 대한 예단은 결코 할 수 없었다.
알려진 정보에 의하면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상태에서, 이른바 혼수상태에서 환각이나 환상을 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실제로 뇌 손상으로 치료를 받고 살아난 사람들 중에 사후세계나 천국을 보고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적잖이 있다. 이른바 임사체험담이다. 대부분 그런 주장은 실제의 어떤 증거물이나 객관적 사실로 입증된 예가 없었기에 십중팔구 환각이나 환상의 일종으로 치부당하였다. 정신병의 한 영역에 환각과 환시 현상이 있음을 상기해 볼 때, 일군의 의학자들이 임사(죽음 직전까지 접근한) 체험자들의 그런 주장(천국을 보았다는..)을 뇌의 이상 작동 현상에 불과하다고 믿는 것은 전혀 놀라운 현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나의 관심을 끌었던 것은
그런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하여 왔던 뇌신경 전문의사가 직접 체험한 후 천국과 절대자의 존재에 대하여 확신에 찬 주장을 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짤막짤막하게 나누어진 35개의 chapter 중 처음 도입 부분(5장까지)을 읽어본 결과 나 역시 <지렁이의 시야>로 천국을 머릿속에 그려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렁이의 시야.'
내가 가진 눈, 그것이 육체의 눈이든 마음의 눈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나는 지렁이처럼 뿌옇게 어른거리는 형태로서의 천국을 상정해왔던 것은 아닐까?
책을 쓴 알렉산더는 의학박사임에도 불구하고 문장력이 빼어나다.
마치 소설가가 표현한 것처럼 묘사력이 돋보이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묘사가 자신이 체험한 사건에 대한 <사실 그대로의 전달>에 방해요소로 작동할 염려를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 살아온 이야기와 사고 후 가족들이 모여드는 과정을 기술한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묘한 매력에 빠져들고 말았다. 보통 남자들이 매력 있는 여자에 잘 빠져드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비록 남자라 하더라도 쉽게 접할 수 없는 매력을 캐치하면 거의 무의식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심미적 실존자이기 때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윤리적 실존을 뛰어넘어 종교적 실존의 영역으로 '실존'의 신분상승을 가능하게 해줄까? 심미적 실존주의자로서 아무리 매력을 가꾸어도 결국은 실존주의 최하층 계급인 심미적 실존주의를 벗어날 수 없음을 생각하면, 그래도 윤리적이거나 종교적 실존자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목적의식 혹은 그리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 생성되고 있기 때문에....
2
나는 홀리(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가끔 성공회 성당에 다녔다. 하지만 수년이 지나도록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에나 얼굴을 내비치는 사람들보다 아주 조금 나은 정도였다. 집에서 아이들한테는 잠자기 전 기도를 하게끔 시켰지만 영적인 리더는 결코 아니었다. 현대 신경과학은 뇌가 의식을 생겨나게 한다고 하는데, 나는 이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중략)
인간의 뇌는 추상적이고 신비로운 만큼이나, 또한 놀라울 정도로 구체적이다. 듀크 대학 의대생이었을 때 나는 현미경으로 길고 섬세한 뉴런 세포를 관찰하는 일을 즐겼다. 뉴런 세포가 시냅스 연결 부위에 불꽃을 일으키면 의식이 발생한다.
(중략)
"우리는 오빠를 보내지 않을 거야." 그녀는 말했다. "우리는 오빠가 필요해. 우리가 오빠를 이 세상에 연결시키는 닻이 되어줄게."
향후에 이런 연결시켜주는 닻이 얼마나 중요한 작용을 했는지 그때 그녀는 알지 못했다.
(6장. 생명을 이어주는 닻)
나는 날고 있었다. 나무들, 들판, 시냇물, 폭포 그리고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보였다. 웃고 노는 아이들도 있었다. 사람들은 둥글게 모여서 노래를 하고 춤을 췄고 그들만큼이나 즐거워 보이는 개가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그들은 단순하면서도 아름다운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변에 만발한 꽃과 나무들이 지닌 따뜻한 생명력이 옷 색깔에서도 똑같이 느껴지는 듯했다.
(중략)
내가 정확히 얼마나 오랫동안 날아다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엔가 내가 혼자 있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 내 옆에 있었다. 광대뼈가 도드라진 푸른 눈의 아름다운 여자였다.
그 어떤 어휘도 구사하지 않으면서 그녀는 말했고, 나는 그것이 진실임을 즉시 깨달았다. 우리 주변의 세상이 실체가 없는 덧없는 환상이 아니라 진짜 현실임을 내가 알 수 있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이번에도 이 사실을 그냥 알 수 있었다.
그 메시지는 세 가지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지상의 언어로 옮기자면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그대는 진실로 사랑받고 있고 소중히 여겨지고 있어요. 영원히."
"그대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어요."
"그대가 저지를 수 있는 잘못은 없어요."
(7장. 회전하는 관문 속으로 들어가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자 나는 완전히 깜깜하고 무한하지만 여전히 한없이 편안하고 거대한 텅 빈 공간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칠흑같이 캄캄했는데도 동시에 빛이 넘쳐흘렀다. 이 빛은 내 가까이에 있는 것 같은, 황홀하도록 눈부신 구체에서 오는 듯했다. 앞에서 천사 같은 존재들이 불렀던 노래처럼, 구체는 살아 있는 듯하면서도 고체같이 단단하기도 했다.
(중략)
칠흑 같은 어둠인데도 빛으로 가득했다. 질문을 하면 답이 주어졌고, 그것은 계속되었다. 우리가 아는 언어의 형식은 아니었지만 이 존재의 '목소리'는 따뜻했고,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인격적이었다.
(중략)
구체를 통해서, 우주가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상상 이상으로 많은 수의 우주들이 있는데, 그 모든 우주들의 기저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다른 우주들에서도 악이 존재하지만 아주 적은 양의 흔적을 남길 뿐이다. 악이 불가피한 이유는, 악이 없으면 자유의지가 불가능해지고 자유의지가 없으면 우리가 성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9장. 중심 근원 The Core을 만나다)
누구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둘째 딸이 그랬던가?) 나는 까칠한 면이 있다.
블로그에 쓴 글 중에도 사회현상이나 권력 주체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나타내 보인 것이 많이 있다. 사실, 비판과 분석. 그것은 과학이나 공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공기와 다름없는 것이다. 공기가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는 것처럼 비판적 시각이 없으면 문제를 해결할 능력도, 새롭고 창의적인 것을 개발해 낼 은총도 힘입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선지자 에스겔은 알 수 없는 이상한 물체를 환상으로 본 적이 있었다.
과학이나 공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은 그 기록.. 선지자 에스겔은 ~같고, ~같고, ~같더라. 하는 식으로 자신이 목격한 것을 묘사했다. 후대의 사람들은 선지자 에스겔이 본 것이 외계인의 우주선이거나 고차원적 지능체가 만들어 낸 로봇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깜찍한 견해이지만 아직 선지자 에스겔의 예언을 정확히 번역하거나 명확히 밝혀낸 사람은 없다. 추기경도 교황도 개신교 목사도..
신약성경에 묘사된 천국의 모습도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요한계시록은 알 수 없는 묘사와 은유와 비유로 점철되어 보통 인간들은 함부로 읽어서는 제대로 알고 올바르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물론 성경을 읽는 자에게 복이 있다고 하였지만 나는 신앙생활에 심취해있을 당시에도 어떤 두려움과 범접할 수 없는 힘에 억눌려 신약성서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의미 있게 읽어 내려가 본 적이 없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나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정확히 모른다.
가 보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보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묘사해 주는 천국을 실재의 공간으로 받아들일 마음 그릇도 되지 못한다. 세상 떠난 전처가 말하였듯이 영의 눈이 뜨이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고 간장 종지만한 마음 그릇이라서 천국을 담을 수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천국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만약 천국이라는 곳이 인간세계와 동떨어진 모습이라면
꿈이나 환상이나 임사상태에서 보았다고 한들 그것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다른 언어로 묘사되고 다른 건축자재로 축성된 세계라면, 다시 말하면 인간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모습과 풍경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표현해 낼 수 있느냐는 말이다. 나는 그런 의구심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성경을 근거로 한다면(천국 개념 in 성경) 인간은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여 창조되었다고 하니, 지상의 모습도 천국과 완전히 별개의 개념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는 가정이 성립된다. 또한 천국의 풍경도 지상과 전혀 별종의 모습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거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종종 신초록이 움터 나오는 봄날, 은은한 햇살을 받아서 밝게 빛나는 연초록 풍경을 천국의 모습이라 우기기도 했었다. 지금도 내 마음의 기저에는 그런 희망이 잠자고 있다.
인간의 입장에서 은하나 우주를 떠올리며 사유해 볼 때
인간이 생각해낼 수 있는 완전한 형체는 구(원)이다. 우주의 메가적 물체(별)는 모두 회전하는 운동성을 가진다. 따라서 우주에서 회전을 통해 만들어질 수 있는 가장 완벽한 형체는 구이다. 그렇다면 이븐 알렉산더 박사가 구체를 통해 인도함을 받았다는 것은 천국과 천국으로 인도해 준 이에 대하여 인간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가능성 높은 방식이 아니었을까?
3
내 육체에서 벗어나 있던 동안에 나는 지렁이 시야의 세계에 속한 진창같이 어두운 지역에서부터, 푸르게 빛나는 관문을 지나, 중심 근원의 신성한 어둠에까지 이르기를 여러 번 왔다 갔다 했다. 몇 번을 그랬는지는 정확히 말할 수 없다.
(중략)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결국 궁극적으로 정말 중요한 것에 대해 배웠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으로 관문에 들어섰을 때, 나비 날개 위에 있는 나의 사랑스러운 안내자로부터 이미 그것을 전해 들은 바 있다.
(중략)
의심의 여지 없이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다. 이해하기 힘든 어떤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는 날마다의 사랑, 배우자와 자녀들을 볼 때 또는 애완동물을 볼 때 느끼는 사랑의 감정을 말한다. 사랑이 가장 강력한 형태일 때 그것은 질투하거나 이기적이지 않은 조건 없는 사랑이다.
(중략)
마음 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가 언제나 집으로 돌아올 능력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본래의 목가적 영역과의 연결을 회복할 능력이 있지만 다만 이 사실을 잊고 지낼 뿐이다. 왜냐하면 뇌에 기반하는 우리의 물질적 삶에서는, 마치 아침마다 태양의 눈부신 빛이 우리의 시야를 가려서 별들이 더 이상 보이지 않듯이, 우리의 뇌가 이 광활한 우주적 배경을 베일로 덮어 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별들로 수 놓인 밤하늘을 본 적이 없다면 우리의 세계관이 얼마나 제한되어 있을지 상상해 보라.
(중략)
우리는 뇌의 필터가 허용하는 것만 볼 수 있다. 우리의 뇌는, 특히 언어/논리를 관장하는 좌뇌는 합리성에 대한 감각과 개인 또는 자아라는 인식을 발생시키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가 더 높은 차원을 알고 경험하는 것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나는 우리의 삶이 지금 매우 중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의 뇌(분석적 좌뇌를 포함해서)가 온전히 작동하고 있는 동안에, 높은 차원의 앎을 더 많이 회복해야 한다. 내가 평생을 바쳐 연구한 과학과, 내가 저 너머에서 배운 것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
(12장. 거대한 사랑을 보다)
나는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어떤 전율을 느꼈다.
얼마 전 나는 5세 이하의 유아기였던 자식들에게 품었던 사랑, 혹은 변려 동물에게 베푸는 사랑의 가치가 정말 중요하다고 사유한 적이 있었다. 그런 마음이 '사랑의 원형'일 것이라 추정했었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나의 사람으로 내 옆자리에 앉히지 못했던 것은 그런 사랑의 경지까지 이르지 못한 결과가 아니었겠는가 하는 반성을 하였었다. 이븐 알렉산더 박사도 똑같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이것은 놀랍고 경이로운 일이다. 나는 찌르르 전기가 통하듯 매우 자극적인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가장 강력한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이라는 말이 진심이고 진실인 것을 나는 온몸으로 인정한다. 그런데 알렉산더 박사는 임사과정에서 그런 사랑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가 뇌의 기능이 정지한 혼수상태에서 실제로 그런 사랑의 감정을 느꼈다면 그건 창조주의 사랑이 틀림없다. 그런 사랑은 지상에서 매우 드물게 목격할 수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성에 대해 그런 사랑의 감정을 품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였다. 나는 그래서 부부로 살아가는 사이에서도 기적 같은 은총이 있을 때에나 그런 조건 없는 사랑의 감정을 서로에게 싹 틔우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부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솔로보다 더 은총 받을 가능성이 높은 것은 틀림없다고 추정된다.
우리의 뇌가 더 높은 차원과 교감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주장은 놀라운 반전이다.
그는 뇌를 연구하고 그 분야의 전문가로 오랫동안 명성을 쌓아왔던 인물이 아니었던가!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븐 알렉산더에게는 의학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부친이 있었다. 그러나 그 부친은 양부였다. 친부모를 찾아가는 과정이 책에 소개되고 있다. 책은 천국의 체험담을 전달하는 chapter와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는 chapter가 교대로 기술되고 있다. 물론 두 가지(줄기)는 하나의 주제로 연결되겠지만..
4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내가 신성의 일부이며 그 무엇도, 결단코 그 무엇도 이 사실을 부정할 수 없음을 이해한다. 우리가 신으로부터 분리될 수 있다는 (거짓) 의혹은 이 세상 모든 종류의 불안심리의 근본 원인이며, 이에 대한 치유는 그 무엇도 우리를 신으로부터 떼어낼 수 없다는 앎을 통해 이루어진다.
(중략)
많은 수의 임사체험자들은 인생을 되돌아보는 라이프 리뷰를 통해 자신이 여러 사람들과 맺은 관계들, 자신이 했던 선행과 악행을 돌아봤다고 보고하고 있다.
나에게는 이런 경험들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나의 임사체험은 매우 특이하고 흔치 않은 측면이 있다. 나는 나의 체험을 통틀어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점에서, 지상에서의 자기를 기억하는 기존의 전형적인 임사체험의 양상이 완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중략)
아주 단순화해서 말한다면, 나는 대다수 다른 임사체험자들보다 더 확실하게 죽은 상태가 됨으로써 더 깊숙한 곳까지 여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략)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고차원 세계로 나아감은 점진적인 경향을 띠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집착이 무엇이든 그것을 놓아버려야만 더 높은 또는 더 깊은 차원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14장. 아주 특별한 임사체험)
물론 나 역시도 이런 관점을 갖고 있었다. 의대 시절에, 의식은 그저 매우 복합적인 컴퓨터 프로그램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들을 종종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들 주장에 따르면 우리 뇌에서 끊임없이 켜지는 10조 개가 넘는 뉴런들이 평생 쓸 수 있는 의식과 기억을 만들어낸다.
(중략)
중심 근원에 있을 때는 소위 '암흑에너지'나 '암흑물질'처럼, 앞으로 여러 세대가 지나도 쉽게 이해되지 않을 그런 어려운 우주의 구성요소들도 명백히 이해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당신에게 이것들을 설명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나 자신도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아직 배우고 있는 과정에 있기 때문이다. 내 경험을 잘 표현하자면, 내가 보다 넓은 또 다른 종류의 앎을 미리 맛보았다고 말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중략)
자유의지는 우리가 지구상에서 수행하는 역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그런데 언젠가 우리 모두 발견하게 되겠지만 이 기능은 더 중요한 역할, 즉 시간이 없는 다른 차원으로 우리가 상승할 수 있게 한다. 보이는 우주 및 보이지 않는 우주들에 있는 다른 세계들, 다른 생명들과 비교했을 때, 지상에서의 우리 삶은 의미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매우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의 역할은 신성을 향해 성장해 가는 일이다.
(중략)
그럼 어떻게 해야 이런 참다운 영적 자아에 가까이 이를 수 있는가? 사랑과 연민을 실천하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영적 세계의 구성 성분 자체가 바로 이러한 사랑과 연민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영적 세계로 되돌아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금 이 세상에 갇혀 사는 중일지라도 그 영적 세계와 같은 모습이 될 수 있어야 한다.
(15장. 뇌가 그것을 방해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지경에서는 놀라운 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진다.
어떤 때는 놀라운 사건을 덮어버리기 위해서 묵은지처럼 창고에 저장해두었던 더 맛있고 씹는 맛 나는 뉴스가 부지불식간에 퍼뜨려지기도 한다. 이해득실을 고려하여 시간차 공개는 더더욱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다.
2년 전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굿와이프>에서..
어느 날 밤 부부는 갈등구조를 노정시키고 있었고, 남편이 아내에게
"당신 너무 흥분한 것 같아. 나중에 얘기하지"
라고 말하니, 아내는
"아니 당신 만나고 난 후 가장 말짱해."
그렇게 말하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할 때 엘리베이터 밖에 서 있던 아내는 엘리베이터 안의 남편에게
"꺼져"
라고 결론처럼 한 마디 덧붙였던 장면.
왜 이 나라 드라마에서는 부부간에 갈등이 개재되어야 개연성있는 부부 이야기가 되는 것일까? 순간 나는 그런 의문이 떠올랐다. 나는 지금 세상 살면서 겪는 <갈등>을 터치하는 중이다.
내가 십구 세일 때, 나는 본격적인 연애를 해보지 못했다.
그 나이때엔 아주 뛰어난 - 여기서 뛰어나다는 것은 여성으로부터 인기를 얻는다는 의미 - 남자가 아닌 대다수의 남자들은 사랑에 빠져보는 일이 쉽지 않았다. 남녀공학이 전무하다시피 한 나라에서 성장했으니까.. 그리하여 중경고딩들을 부러워했었던 열아홉의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란 무엇이었지?
육체는 이미 여물어 있어 언제든지 성관계를 시도할 수 있는 상태였다. 대체적으로 젊어서 <사랑>이란 <섹스>를 의미하는 경우가 많다. 나의 경우를 되돌아보았다. 그 시절 내가 이성을 통해서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던가. 당시 나에게 절실히 중요한 것은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얻는 거였다.
공감하시겠지만, 이성 간의 소통과 교류가 있어야 상대방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럼 '마음'이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오늘날 전문의들은 말한다.
'마음'이란 뇌의 작용의 산물이며 뇌신경 속의 뉴런과 뉴런이 연결되는 시냅스 부위에 불꽃이 튈 때마다 의식의 흐름이 생성된다고.. 결국 '마음'이란 뇌신경의 성장(성숙화 과정)을 거쳐야 제대로 기능을 발휘하며, 인간 개체는 그 후에 비로소 소통이 원만해지는 수준에 도달한다.
그런데 열아홉의 남자로 되돌아가보면, 남자는 신체적으로는 수억 마리의 정자를 생성하여 샷을 날릴 수 있도록 발육이 이루어졌으나 뇌의 신경망은 아직 촘촘하게 채워지지 않은 상태이므로, 마음의 소통이나 교류를 통하여 사랑을 성사시키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나는 여기서 <신>의 창조 과정에 중대한 오류가 발생했었다고 주장한다.
인간을 만드신 <신>이 애초에 열아홉의 인간 남자가 완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도록 뇌신경의 발달과 성숙이 생식기의 성숙화 과정과 일치하도록 설계하였으면 될 일이었는데.. 인간 수컷은 <사랑>과 <섹스>가 결부되도록 설계한 태초의 오류 때문에 진짜 중요하고 소중하며 전 우주적 가치를 지니는, 아니 저 천국의 공기와 같은 <참 사랑(마음의 교류)>의 가치를 언제나 차순위 혹은 후 순위로 밀어내어 버리고 만다.
그 태초의 오류란 무엇인가?
<신>은 아마도 <마음의 교류>보다는 <생식의 성공>에 포커스를 맞춘 것이 아니었을까? 민들레가 자손을 번성키 위해 무수한 홑씨를 바람에 흩날리듯이, 인간 수컷이 인간 암컷의 난자와 도킹할 수 있도록 수억 개의 정자를 비장한 각오로 내보내게 만든 것처럼.. 어쩌면, 말로는 <사랑>한다고 되뇌면서 행동으로는 자기의 <욕심>만 챙기는 인간 종족처럼 <신>께서도 그 큰 <사랑>의 세계에 거하시면서 인간을 만드실 때는 <생식>에 집착하신 것은 아니었겠는가 말이다. 그런 생각의 말단에서, 신은 자신의 외양을 따라 인간을 만들었지만 자신은 생식의 기능이 없으므로 그 부분에 부실함이 내재했을 수 있다는 망측한 추론까지 떠오른다...
<마음의 교류>가 <사랑>이고 그것이 지상과 우주와 저세상(천국)까지 포함해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라면, 애초부터 <신>께서는 <섹스>와 <사랑>이 연동되지 않도록 하였어야 했다. 그렇게 중요한 <사랑>이라는 가치를 <생식>의 수단인 섹스와 연동시킴으로 인간 수컷과 암컷은 가임 기간이 지난 후에도 섹스를 통한 만족 향유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이는지 모른다. 그로 인해 또 얼마나 많은 불륜과 파혼이 일어나는지.. 오르가즘이란 인간 수컷의 튜브를 통해 분사된 정자가 인간 암컷의 난자와 쉽게 도킹이 일어나도록 몸속의 체액을 혹은 몸속의 길이 잘 열리도록 배치하였던 <장치>에 불과했던 것인데.. 왜 <신>은 쾌락을 추구하는 인간 종족의 습성이 일평생 유지되도록 하여 생식이 끝난 후에도 <섹스>를 통한 <사랑>의 확인 작업을 되풀이하게 만들었던 것일까?
이븐 알렉산더는 <나는 천국을 보았다>는 책에서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부여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문단을 읽었을 때 나는 알듯 모를 듯 묘한 감정이 분출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고, 한편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나를 이해해야 했다. 인간에게 선택의 자유가 주어져있기 때문에 각 개체는 스스로 지상에서건 천상에서건 존재의 의미를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예정된 것으로 정해진 루트를 따라 전개되는 전구의 불빛에 불과하다면 그야말로 사르트르가 절규한 <왜 존재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이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인가>라는 항의가 인간계 도처에서 발호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이븐 알렉산더는 왜 <자유의지>를 필요악처럼 묘사했을까? 그가 주장하는 <자유의지>의 가치는 그가 보았던 천국의 주관자(=아마도 야훼)으로부터 계시받은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어진 자신의 견해인 것일까? 그런 질문이 나의 입안에서 뱅뱅 맴돌고 있다. 이러는 나는, 하나의 컴퓨터 체계도 아니고 로봇도 아니니까 자유의지에 따라 사유할 수 있는 일이다. 선도 악도, 믿음도 불신도, 초록이나 파랑, 혹은 노랑이나 보라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렇게 주어진 <자유의지>란 종교적으로 음미하면 인간이 신에게로 나아가는 도어이자 통로인 셈이다. 왜 그런 <자유의지>가 천지에 미만해있는지 모르지만 만물을 지으신 <신>이 그런 장치를 마련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 아닌가? 그 <자유의지>가 있으므로 나는 마음이 내키면(?) 얼마든지 나를 지으신 <신>의 마음을 아프게 할 수도 있고... 하지만 내가 쓰는 이 글로 인하여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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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미에
이븐 알렉산더가 쓴 <나는 천국을 보았다>는 글이 상당히 매력적인 체험담이었다. 그래서 책을 독파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책 독후기는 여기서 마무리한다. 천국의 실존 사실을 입증하는 후기를 쓰지 못하였으니 나의 독후기는 실패한 독후기일런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에게 천국은 머나먼 여정의 종착지에 존재하는 것일까? 한때는 천국의 말석이라도 얻어 탈 수 있으리라 믿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