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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3/10 3

반성 - 이돈형

반성-이돈형 나는 죽었다비좁은 방에서 좀생이처럼 굴다 헐렁한 새벽에 끼어 죽었다날마다 죽겠다는 거짓말을 하며 수많은 거짓말에 파묻혀 죽었다잘 가세요 잘 있어요 누구나 흔드는 생의 손 한번 흔들지 못하고 죽었다죽고 싶다고 외치다가 죽어도 죽기 싫다고 외치며 죽었다두 다리를 흔들며 복, 복, 복 거리다 복에 겨운 줄 모르고 죽었다불행한 생을 흉내 내다 다정한 생의 지퍼를 열고 죽었다독설을 뱉으러 비 내리는 한탄강을 찾아가 독설에 빠져 죽었다 육체를 사랑한 여인의 배꼽 위에서 그녀의 위로를 견디지 못해 시들어 죽었다죽지 않으면 죽을 만큼 살고 싶어질까 봐 미안해 죽었다짜장면을 시킬까 짬뽕을 시킬까 수없이 고민하다 죽었다공짜 좋아하다 공짜로 얻은 죽음이라 좋아 죽었다아주 긴 죽음에서 깨어나듯 그렇게 기지개를..

사랑에 부쳐 - 김나영

사랑에 부쳐 - 김나영 산도둑 같은 사내와 한 번 타오르지 못하고손가락이 긴 사내와 한 번 뒤섞이지도 못하고물불가리는 나이에 도착하고 말았습니다모르는 척 나를 눈감아줬으면 싶던 계절이맡겨놓은 돈 찾으러 오듯이 꼬박꼬박 찾아와머리에 푸른 물만 잔뜩 들었습니다이리 갸웃 저리 갸웃 머리만 쓰고 살다가마음을 놓치고 사랑을 놓치고 나이를 놓치고내 꾀에 내가 넘어가고 말았습니다암만 생각해도 이번 생은 패를 잘못 썼습니다 ................................. 나의 감상 이런 시에 '캐공감'하면 안 되는 인생인데나는 그리 공감이 간다. 이번 생은 얼마나 남았을까? 나이 먹으신 분들이 이제는 빨리 저세상으로 가고 싶다며, 그동안 이 세상 살면서 사용해 온 육신의 노쇠함을 한탄하던 말들이 ..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현미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 치의 방과 한 달 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 국밥을 먹었다 순대 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 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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