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시가 넘어 둘째가 출근 차비를 한다.
나는 급히 계획했던 헬스장 가는 걸 포기하고 둘째를 따라나서며 변명했다.
"아, 오랜만에 인천공항 구경 좀 하려고 그래.."
둘째는 흔쾌히 나의 동행을 허락한다.
둘째가 외출하려 폼 잡으니 그녀의 식구인 냥이가 어느새 조르르 달려 나와 배웅하듯 쪼그리고 앉는다.
물론 그건 냥의 속내를 헤아려서 하는 말이다. 내가 만두(냥)의 소리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니 나의 감정으로 반려캣의 심리를 해독하는 것이다. 아무리 냥이의 언어를 모른다 해도 그 표정과 그 몸짓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것 아니겠는가. 냥이와 동거 생활이 길어지니 오히려 그 행동거지가 냥이의 것이 아니라 강쥐의 것처럼 보여 의아하게 여겼던 점은 있었지만.. 그러나 겪어보니 알게 되는 사실 하나는 동물이란 가까워지고 친해지면 인간 이상으로 살가운 관계로 맺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둘째가 냥이를 입양하기 전만 해도, 나는 냥이란 인간에게 적대적인 동물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어서 언젠가 손이나 얼굴이나 장딴지에 긁힘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했었다. 하지만 같이 살아보니 인간보다 더 좋은 품성을 가진 녀석임을 알게 되었다.
은행나뭇잎이 아름답게 장식한 서울 변두리 길을 걸어 나는 둘째와 함께 공항철도 계양역 가는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향했다. 밥을 챙겨 먹지 않은 녀석은 사거리 정류장 못 미친 곳의 빵집에 들어가더니 샌드위치를 사들고 나온다. 내가 녀석을 따라나서며 주머니에 찔러 넣어 가지고 온 마트에서 파는 아메리카노 커피 한 병을 꺼내 보이며 '마실래?' 하니 '우유 가지고 온 거 있어요'한다. 일전에 택배로 배송받은 두유 한 박스 중 한 개를 백에 넣어가지고 왔던 것이다. 버스에 앉아서 둘째는 샌드위치를 먹어 치운다.
"근무지가 공항 1터미널이니 아님 2터미닐이니?"
"새로 생긴 데예요"
아, 참.. MZ세대랑 소통하려면 센스도 있어야 하고 눈치도 빨라야 하고 머리회전도 잘 되어야 한다. 그게 안되면 큰일 날 것만 같다. 둘째의 대답을 듣고 나서 인천공항 안에 있는 편의점 알바하는 것만 알고 있던 나는 비로소 녀석이 2 청사에서 일하는 것을 확인했다. 평소 나는 왜 둘째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았던 거지? 내가 그런 질문을 한다고 해서 둘째에게 매 맞는 것도 아닌데.. 내가 묻지 않으니 둘째가 말하지 않았던 거고.. 둘째에게는 잘못이 없는 거 아닌가. 세상의 모든 관계는 말하지 않으면 진전되지 않는 것이 진리인 듯싶었다.
계양역에서 내려 공항철도를 탔다.
벌써 객차 내 분위기가 다르다. 앞자리에 커다란 캐리어를 잡고 자리에 앉는 2명의 젊은 여성은 윤기 나는 짙은 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중 한 여성은 은테 안경을 쓰고 있어 마스크의 매력을 한층 북돋우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동남아 여인들도 꽤 매력적인 마스크가 있구나.'라고.
세상구경 중에서 사람 구경은 무시할 수 없는 즐거움을 준다. 도촬을 해볼까 생각했다가 그러다가 몰카범으로 몰려 난처해질 것 같아 포기했다. 시선을 딴 데로 돌리니 공항철도 객차엔 선반 위 짐칸이 없는 대신에 한쪽 구석에 캐리어를 보관하는 짐칸이 컴파트먼트의 부분처럼 만들어져 있었다. 어떤 아시아계 남성은 아무리 쳐다보아도 별 볼일 없는 것 같은 옥외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다. 왜지? 나는 그 남자가 렌즈를 주사하는 창밖의 풍경을 힐끗 쳐다봤지만 그가 사진을 찍는 목적을 알아차릴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공항철도 차량은 1 터미널을 지나 종착역 2 터미널에 도착했다.
이국의 그녀들은 1 터미널에서 이미 내렸다.
나는 둘째를 따라 2 터미널의 3층까지 올라갔다. 2 청사는 지은 지 얼마 안 되는데 깔끔하긴 하나 특징적인 멋도 없는 것 같고, 고급스러운 분위기는 더더욱 느낄 수 없었다. 이게 첫인상이라니. '아.. 국제공항이라는데 너무 한국적이군.' 혼자 그렇게 중얼거린다. 둘째는 오후 3시부터 근무가 시작되지만 좀 일찍 왔으니 파리바게뜨 아웃사이드 탁자에 앉아 같이 시간을 때우자고 한다.
"대근이 많이 나왔는데 할까요?"
"하면 좋지. 대근하면 그 사람 일당을 니가 받는 거 아니냐."
"네. 하지만 일을 너무하면 스트레스를 감당 못할 수도 있으니까요"
3교대로 24시간 운영되는 편의점.
한 개조에 4명이 일한다고 하여 굉장히 규모가 클 거라 예상했는데 혼자서 편의점 가까이 접근하여 둘러보니 그다지 커 보이지는 않았다.
"야간 대근도 나왔는데 할까요?"
"글쎄"
"여긴 사람들 왕래가 많아 편의점 강도를 염려할 필요는 없어요. 야간대근은 일비도 더 줘요."
"얼만데?"
"12만 원 줘요."
나는 녀석의 대근 욕심이 선뜻 이해 가지 않았다. 하루 7시간 근무하는 것도 너무 많아서 5시간 정도 하는 동네 편의점으로 옮기면 어떨까 상담을 요청했던 녀석이지 않았던가. 그러다 문득 물었다.
"너 또 돈이 필요한 거냐?"
내가 매달 녀석에게 지급하는 용돈 겸 생활비 70만 원을 25일 입금시켰기에 거기까진 생각이 못 미쳤는데..
아니나 다를까 내 예감이 맞았다. 녀석이 멋쩍게 웃으며 말한다.
"사실, 어제 돈 좀 썼어요."
어처구니가 없는 녀석의 처신. 나는 당최 녀석을 이해할 수가 없다. 고려대학교에 400억을 기부한 어느 노부부의 마음보다 녀석의 마음 읽는 것이 더 어렵다. 나는 아무리 채점해 봐도 관계의 능력은 낙제점을 벗어나지 못한다. 언제쯤 나는 너의 진심에 다다를 수 있을까.
녀석과 헤어져 혼자 돌아오며 생각했다.
'나는 오늘 왜 헬스장 가는 것까지 포기하고 녀석과 함께 인천공항 나들이를 하였을까?'
나는 마음이 가는 대로 행동하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향하는 사람이지만 어떨 땐 내면의 감추인 이유를 알아야 하는 때도 있다. 나는 시나브로 속사람을 불러내어 무의식의 세계를 조망한다. 아.. 뭔가 보이는 게 있다.
그래... 나는 녀석의 일상에 관심이 많으며 너를 사랑하는 마음을 지닌 아빠라는 걸 나타내고 싶었던 거였다.
그렇다면 녀석은 나의 마음을 알아차렸을까? 사람은 아무리 가까워도 말을 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가 없는 존재인데...
이심전심은 도통한 사람들 사이이거나 아니면 똘끼충만한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
나는 어쩌면 고양이를 이해하는 것보다 사람 마음 읽는 것을 더 어려워하는 허접한 마당쇠일 뿐이다. 그러하니, 나는 오늘도 도사님 앞마당이나 열심히 쓸어야겠다. 그런데.. 나는 나의 도사님 존함도 모른다. 얼굴도 모른다. 그래도 도사님 앞마당을 쓸지 않으면 안 된다. 도사님 마당에 흩날리는 은행나무, 단풍나무, 벚나무의 이파리들을 사각사각 쓸어 모아보자.
마당쇠가 마당을 쓸 땐
잡생각이 나지 않아서 좋더라....
'with Daughter'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트 테러 (2) | 2025.03.29 |
---|---|
매일 부활하는 남자 (5) | 2025.03.29 |
1 순위자와 2 순위자 (0) | 2025.03.29 |
뚱딴지 같은 일기 (3) | 2025.03.28 |
나는 한 마리 콘도르 (1) | 2025.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