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제 아침 둘째는 휴일인데 출근한다면서 말했다.
"2만 원만 빌려주세요. 휴일근무자 대근해주면 밤에 일비 입금될 거예요."
나는 순간적으로 '욱' 하는 송충이가 내면의 감방을 탈출하여 몸 밖으로 튀어나오는 걸 느꼈다. 서대경 시인은 술이나 마시면 내면의 원숭이가 튀어나온다 했는데 나는 성질머리가 더러워지면 비슷한 현상을 일어난다. 순간적인 변신기제를 제어하는 노하우가 아직까지 신체에 장착되지 못한 것이다.
"너 월급 120만 원 수령한 게 언제라고 벌써 돈 빌려달라는 거냐?"
"120 중에서 교통비 13 나가고 저금하려고 아버지에게 30 이체시켰잖아요."
"그래도 그렇지. 그거 제외하면 7,80이 남는데 그걸 열흘 만에 다 닦아 썼다는 게 말이 되는 얘기냐구"
나는 몸은 식탁 언저리에 세워놓고 둘째와 대치하도록 한 채 잠시 마음을 유체이탈시켜 지난 10일 이후 둘째가 벌인 소행을 소환해 냈다. 유독 둘째에게 임재하기 잘하는 지름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1) 냥이 만두 사료와 화장실 내부 충진물..
2) 둘째가 선호하는 식량. 닭 가슴살 비닐팩 한 박스와 닭 가슴살 소시지 한 박스
3) 두 유 한 박스
4) 메이커를 확인 못한 흰색 운동화
5) 머리 손질용 도구들
또 무언가 박스에 포장되어 들어온 것..
"별로 쓴 거 없어요"
나는 그렇게 핑계를 대는 둘째에게 소심한 반격을 시작했다.
"실내 사이클 기구 옆에다 만두(냥이)가 뱉어 놓은 토사물은 니가 치워라"
"안 돼요. 지금 외출해야 한단 말예요"
나는 별 수없이 쓰레받기로 만두의 토사물을 걷어 쓰레기봉투에 투척해 놓고, 쓰레받기를 화장실에서 씻은 다음, 토사물을 걷어낸 사이클 기구 주변을 걸레로 마무리질했다.
그리고 2차 반격을 감행했다.
대상은 둘째가 식사를 하고 치우지 않은 식탁 위의 식기와 수저들, 그리고 전자레인지 주변에 널브러져 있는 비닐포장지와 쓰고 남은 휴지 뭉텅이들..
"버릴 거 플라스틱과 종이류 구분해서 쓰레기통에 넣기만 하면 되는 것을 이것도 못해서 사방에 널브러지게 하니"
원래 설거지는 내가 당번이기 땜에 식기세척까지 공격하는 신공은 발휘하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딸은 외출 준비하느라고 지혼자 분주했다.
나는 나의 2차 공격마저 전과를 올리지 못하자 마땅한 무기를 찾지 못해 말풍선을 터뜨리기로 결심하고 공지문 안내하듯 전언했다.
"방바닥에 널브러진 양말이며 수건들.. 세탁할 것은 세탁기에 넣어두고 사용하는 건 바닥에 방치하지 좀 말아."
둘째는 어느새 외출봇으로 변신을 완료하고 떠날 채비다.
"알았어요"
멋쩍은 웃음을 띠며 그녀는 세상 밖으로 떠나가 버린다.
둘째가 사라지면 그녀의 식구이자 반려동물인 냥이는 섭섭함을 토로하듯 야옹거리며 거실을 정신 사납게 거닐곤 한다. 그리고 주인이 없으면 동거하는 남자의 체온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심산인지 내 곁으로 다가와 스킨십을 시도한다. 이 맛으로 사람들은 반려 캣을 키우는 모양인가? 나는 내 삶의 화면이 <딸과 함께>에서 <냥과 함께>로 전환된 것을 인지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마음은 아직 딸에게서 완전히 돌아서지 못한 상태였다.
나는 가끔 하릴없이 시시껄렁한 공상을 즐길 때, 내가 못생긴 것은 아마도 어머니 탓이며 나에게 평균 이상의 공부머리가 있었던 것은 어머니 덕분임을 복기해 본다. 이율배반적이며 언터처블한 태생적인 요인. 그렇게 물려받은 공부머리는 학창과 직장 입사까지 유효했고 그 이후의 세상살이에 더욱 필요했던 건 처세술이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친부와 친모 모두 나에게 처세술의 노하우만은 물려주지 않았었다. 그분들도 물려받지 못한 탓이다. 대신 나에게 생긴 '글 쓰는 취미'는 아마도 살아생전 사진작가였고 피아노 회사 광고부장을 지냈던 아버지의 유산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보았다. 그리고 아버지는, 좀 더 근원적으로 파고 올라가 보면 머나먼 최치원 할아버지로부터 그런 자질을 물려받았겠지..
그럼 둘째의 저 어지르기 신공과 지름신을 받아들이는 노하우는?
나는 적어도 지름신의 임재에 오픈된 마인드를 탑재한 둘째의 천성은 세상 떠난 전처로부터 물려받았으리라는 심증을 굳히게 된다. 어릴 적 나는 아버지로부터 매사에 철두철미하지 못한다는 잔소리를 귀에 달아놓고 살았으므로 아버지 쪽으로 대물림된 것은 아닐 터. 하지만 어지르기 신공은 나에게서 물려받은 듯.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우울증 후유 증세일 수도 있을 법한데.. 하지만 경험적으로 나이를 먹으면 자정작용에 의해 바로 잡히기도 하지 않는가!(나의 사례) 그리하여 나는 평소, 둘째의 어지르기 신공을 보며 그러려니 하고 넘겼었다. 시간이 해결해 주겠거니 했다.
어제는 둘째의 실수를 찬스로 여겨 평소 할 말을 다하지 못하며 살았던 아비의 반격신공이 발휘하였는데 사실 조금 아슬아슬했었다. 둘째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었을 정도로 위험한 선까지 나아갔던 것이다. 그러고 나서 나는 오늘 하루 종일 늦깎이 영어공부에 매달려 언어에의 도통을 염원하며 용쓰고 또 용쓰며 보냈는데, 밤 10시가 넘어 아침에 빌려준 만 오천을 입금했다는 둘째의 문자를 받았다. 그걸 본 나는 '아.. 아침에 그런 금전거래가 있었었지' 혼잣말을 해보며 새삼스레 인지한다. 이래서 기록하는 게 중요한 일인 거지. 나는 나에게 그렇게 말하며 밤 11시가 넘어 귀가하는 둘째에게 "오늘 돈 많이 벌었니"라고 아재 개그를 발사했다. 둘째는 썩소 방탄막으로 능수능란하게 대응하며 자기 방으로 직진한다. 우리 집 풍경은 마치 김영하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 버전 같다. 단지 김영하 소설의 오빠 역이 둘째로 바뀌어 있다는 것만 다를 뿐.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둘째의 뒤태를 보며 생뚱맞게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둘째의 인물이 괜찮은 것은 지 엄마로부터 물려받은 덕분이다. 내 유전자가 재 뿌리지 않았다면 더 이뻤을 텐데..
아이 엄마가 마음의 스크린에 달처럼 떠오른다.
만약 저세상이 존재한다면, 이 세상과 저세상을 경험한 이혼한 전처가 나와 둘째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할까 궁금해졌다. 세상을 떠난 후 단 한 번도 꿈에서 조차 나타나지 않은 그녀는, '꿈에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저 세상살이가 나쁘지 않을 거라' 여기는 나를 보고 있을까? 그런 나를 또 다른 내가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모습도 지켜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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