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상한 소문>의 1부 2장은
<또 다른 세상에 대한 소문>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또 다른 세상이란 무엇일까요? 만약 그것이 종교인들이 말하는 내세를 지칭한다고 전제하면, 지구별 인간들 중에는 '또 다른 세상'의 '존재함'을 믿는 사람도 있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저자는 '양'에 관한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 나는 방목장에서 발아래를 살피며 조심스레 조깅하면서 양의 관점에서 보는 삶은 어떤 것일까 상상해 보았다.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 그놈들은 고개를 처박고 우거진 푸른 풀을 찾아 돌아다닌다. 성가신 개는 툭하면 짖어대고 발굽을 물어댄다. 개 짖는 소리가 듣기 싫어, 또는 놈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양들은 개가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러면 자, 그곳에는 더 많은 풀들이 펼쳐져 있다. 날씨가 변하면 양들은 비와 바람을 피해 이리저리 몰려다닌다.
1년에 한 번, 난폭한 숫양이 나타나 이 양 저 양에게 차례로 덤벼들어 암양들의 궁둥이에 특이한 색깔을 남긴다. 그럼 암컷의 배가 부풀어 오르다 새끼가 태어난다. 어미가 된 양은 까불대는 작고 어린 양들이 젖을 떼는 일과, 풀숲을 다니며 장난치는 녀석들을 지켜보는 일에 관심을 집중한다. 태즈메니아데빌(육식 유대류)의 습격으로 목숨을 잃는 양들도 있다. 평소에는 잘 지켜주던 두발짐승에게 끌려가서 돌아오지 않는 양들도 있다. 그 직립 동물은 정기적으로 양들을 헛간으로 데려간 뒤 털을 다 깎아버려 한동안 난처한 상태로 지내게 할 뿐만 아니라 추위에 떨게 만든다.
조깅을 하던 나는 양들의 입장에선 그들의 운명이 그들 자신에게 달린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가끔씩 양치기 개, 태즈메니아데빌, 숫양과 인간이 방해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그놈들은 내키는 대로 되새김질을 하고, 들판을 돌아다니며, 제 마음대로 살아간다. 양들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의 모든 단계가 방목장 한쪽 구석 집에 사는 인간들의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지 못한다.
C.S 루이스(Lewis)는 "자연에는 여러 층이 있어 상위의 자연이 하위의 자연에 대해 초자연이 될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언젠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에게 고기와 가죽과 기름을 제공해 주는 가축들..
동양에선 소와 돼지와 염소 등등,
그리고 서양에선 그놈들 이외에 양과 말과 캥거루와 그 이외의 등등등 가축들..
그들은 어찌하여 태어나서 인간에 의해 사육당하고 고기로 먹히는 삶을 순응하며 사는 것일까요?
관연 '순응'이라 표현하는 게 맞는 걸까요?
아무리 가축과 인간 사이에 범접할 수 없는 심연 - 이를테면, IQ의 차이 - 이 존재한다 하여도 종내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필립 얀시의 책을 읽으며 평소에 품고 있던 그런 의문이 다소간 해소되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은 초자연적인 존재였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세계에 필립 얀시의 논리를 대입해 보죠.
인간에게 <신>의 영역은 불가침에 해당합니다.
알 수 조차 없습니다.
결코 침범할 수 없는 초자연계의 영역, 초능력의 세계처럼 넘사벽입니다.
그래..
그것이면 설명이 가능합니다.
가축들에게 있어서 인간이란 그런 존재(신)로 비쳐졌고, 가축들은 인간을 그렇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놈들은 자신들이 인간에 의해 사육당하며 어느 정도 성장한 몸집을 가지면
아무 말 없이 데려가서 먹힌다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다면 인간에게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켰어도
백 번은 더 일으켜야 정상인 구조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그리할 수 없는 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의 존재는 초월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요?
그들의 지능과 머리 구조로는 인간의 생각을 알 수도 없고 해석할 수도 없어요.
그러니 감히 덤벼들 자각을 할 수 없는 겁니다.
목자가 개를 이끌고 말을 탄 모습으로 나타나 하루 몰이를 시작하면 그 지시에 따르는 것이 그들의 삶의 원형이 되었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 지 못한 채 풀과 개와 인간의 틈바구니에서 살다가 갑니다.
그들은 어떻게 죽음에 이르는지도 모를 겁니다.
야생의 양들이라면 생로병사를 다 경험할 터이지만
사육당하는 가축은 대개 언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떠나는 동족을 보며 살아왔을 테니..
그리고 그것을 그네들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지요.
<운명>이란 추상명사를 생각해 내거나 떠올리진 못하겠지만
그런 비스무리한 감정의 흐름을 느낄 겁니다.
그런 양들에게 인간은 '절대자의 모습' 혹은 '절대자에 근접해 있는 존재'로 비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실제 양과 목자의 관계는
피조물과 조물주의 관계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초자연적인 힘이 흐르고 있어 매우 끈끈한 관계를 만들고 그런 환경을 조성해 주는 거부할 수 없 존재로 인식될 것입니다.
그런 관계..
왜 저자가 책의 서두에서 양 이야기를 끄집어 내었는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양과 목자의 관계...
아름다운 관계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무서운 관계?
아니면 섬뜩한 존재의 원리를 담고 있는 관계?
머리가 아파오는 분들은 스킵 해버리십시오.
그래도 생각해 볼 가치가 있다 여기시는 분들은 더 나아가셔도 좋습니다.
인생이란..
감당할 범위 내에서 시도해 보는 신비로운 탐험과도 같습니다.
이 책이 그 답을 줄 것이라고 믿지 마십시오.
해답은 스스로 찾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모든 저자나 목회자나 정치지도나 또 다른 스승이나
그들은 하나같이 '참조사항'
영어로 표현하면 '레퍼런스'일뿐입니다.
답이 아닙니다. 취하거나 버릴 판단은 각 개인의 몫입니다.
그리고 인생의 모든 길을 걷고 난 뒤,
인생의 답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인지는 '또 다른 세상'에서 가서 확인할 뿐입니다. 이집트인들이 거의 1만 년 전부터 저쪽 세상에 대한 관심사를 진하게 표명했지만 그 이집트인 중 어느 하나도 지금 이 땅에 남녀진 사람은 없습니다. 다 사라졌습니다. 저쪽 세상으로 갔을 테지요? 그곳에 그들은 답이 무엇인지 다들 확인했을 겁니다. 아니면,
'또 다른 세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버리고 그들의 흔적은 이 세상에도 없고 저세상에도 없게 되었을 수 있습니다.
그냥 죽으면 <끝>, 혹은
<The End>가 되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진실이라면 우리도 생명이 다하는 순간이 왔을 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스러지겠지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는 우리의 흔적이 그대로 남을 겁니다.
오디오로, 비디오로, 사진으로, 활자매체로,
우리의 흔적은 죽어도 없어지지 아니한 채 세상에 남게 됩니다.
그래서 죽어도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소문은 끊이지 않고 계속될 것입니다.
정말 수상한 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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