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이 되어 서울집에 올라온 나.
둘째는 다행스럽게도 오늘 출근하였다. 오후 3시에 시작해서 밤 10시에 끝나는 편의점 알바. 인천공항 내에 위치하고 있다는데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해외 나갈 일이 없는 사람은 인천공항에 가면 하늘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나는 멀리서나마 둘째가 일하는 모습 훔쳐보기 하는 걸 하지 않았다. 신파 드라마 보면 배우 최수종이는 그런 거 잘하던데..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방식은 매우 소극적이다.
아침에 "오늘 출근할 거니" 물으니
"병원에 가서 의사 선생님 얘기 들어보고요"라고 말했던 둘째.
내가 거실 소파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나만의 꿍꿍이속 작업을 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일어나 냉동고에 쟁여놓은 닭 가슴살 한 봉지를 꺼내 전자레인지로 데워 식사를 하는가 싶더니 또 어느새 둘째는 휑하니 나갔다. 나는 둘째의 거실과 식탁에서의 소행이 시야 가장자리로 어른거린다고 느끼면서 컴퓨터 작업에 정신 팔렸다가 둘째가 외출한 후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길래 전화를 했다. 바로 받는다.
"병원에 다녀왔니?"
"네."
"집에는 안 오고"
"네. 바로 출근하려구요"
"알았다. 잘 다녀오도록 해라."
내가 둘째와 대화하는 스타일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길게 논쟁에 가까울 정도로 의견을 주고받는 것과 무미건조하고 약간의 사무적인 느낌이 들 정도로 간명하게 주고받는 것.
대개의 경우.. 간명하게 대화 나누는 때가 좋은 상황임을 대변한다고 보면 된다. 금전적인 문제로 용돈 가불을 요청해 오면 잠시 기분이 유쾌하지 않음을 암시하듯 이유를 물어보는 것 외에는 대체적으로 간명한 대화가 뒤끝이 괜찮다.
길게 대화를 이어가는 사례는 다양한 이유가 동기로 작용한다. 한때는 페미니즘에 대하여 의견 대립처럼 여겨지는 논쟁을 벌인 적도 있었다. 혹은 마뜩잖은 남자친구를 사귈 때 나의 의사를 표명하면서 서로 평행선을 달리며 질주하는 기관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초기에는 갈등이 심해져서 매우 심각한 상황까지 내몰리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흐르고 서로에게 익숙해지거나 어느 정도 길들임의 신공을 주고받으면서 상당히 좋아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내가 습득한 노하우는.. 둘째가 성장할 때 엄마로부터 소외당했거나 이유 없는 체벌을 받았다는 심리가 무의식의 깊은 바닥까지 스며들었다는 것. 그럼에도 아빠는 지방 공장에서 근무하며 주말에나 보게 되어 자신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지 못하는 사람으로 존재했다는 것. 즉 하숙생 같은 아빠에 대하여 유년기 애정결핍의 보상심리가 진하게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둘째가 가진 문제의 본질에 접근할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언행으로 둘째의 마음을 위무해 주는 일을 실천하지 못한 채 겉돌기만 했다. 그나마 내 성질을 죽이고 참으면 결과가 좋은 방향으로 유턴되는 사실이 긍정적인 기운으로 작용하였었다. 그리하여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하지만, 나는 여든이 되기 전에 조금씩 아주 조금씩 이를테면 영어 귀가 뚫리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오늘 아침 내가 둘째와 나눴던 대화나 통화도 그런 결실의 하나였다.
나는 둘째가 나의 기대와 희망을 채워주지 못할 때에도 내 마음의 아쉬움을 드러내기보다 둘째의 입장에서 둘째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고려하는 마음만 드러나도록 했다. 그렇게 내 마음을 조작(?) 함으로써 최선은 아니더라도 차선을 도모할 수 있음을 알았다. 그런 깨우침 혹은 기술 습득을 할 수 있음은 진정 감사한 일이었다. 나는 세례신자이니까 위에 계신 그분께 감사할 일이 생기면 감사하는 게 옳은 처신인 것이다. 암튼, 오늘 둘째는 출근하였고, 밤 11시가 넘어 정상적으로 귀가하였다. 나는 귀가하는 그녀와 아주 일상적이며 지극히 간명한 대화를 나눈다.
"밖에 날씨가 춥지 않았니?"
"네 별로 춥지 않아요."
"오늘 하루 일은 잘했고?"
"네.."
둘째는 냉장고 문을 열어 오후에 택배로 배송된 두유 한 박스가 자리 잡고 있는 풍경을 보더니 "두유, 제 거예요."라고 말한다. 나는 새삼스럽다는 듯 대꾸한다. "그럼, 당근이지." 그러자 둘째가 보충 설명이라도 하는 듯 덧붙인다. "저번에 인터넷 구매했던 제리포 상당량이 없어졌더라고요." 나는 정색하며 대꾸했다. "겨우 한 두 개 먹었을 껄? 대부분 니가 먹었잖니?"
그렇게 사무적인, 그러나 둘째 입장에선 평소 문제로 여겼던 사안들에 대해 간단한 대화를 나눈 후 자신의 반려냥 <만두>의 영접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간다. 그와 동시에 나는 오늘도 무사히 흘러간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변신로봇이 된다. 내가 사춘기를 보내면서 마음의 안식이 되었던 예배당에서 <범사에 감사하라>는 금언을 배우고 외웠지만 나는 언제나 변신로봇이 무슨 일이 생길 때만 무적의 로봇으로 괄목상대해지듯 꼭 무슨 일을 겪어야 감사하는 마음의 일단을 드러내곤 하였다. 내 몸이 로봇이 아님에도 마음은 너무 굳어있어 좀처럼 긍정적인 캐릭터로 유연하게 전환되지 않음을 느낀다.
'아.. 나는 꼰대가 되긴 싫어.'
'나는 더 부드럽고 유연해져야 해.'
태생이 경상도 출신이지만 거의 50년을 서울에서 살았는데.. 나는 빡빡한 상도 꼰대로 변신하게 될까 봐 겁이 난다. 보통 나이 먹는 남자들은 젊은 여자를 좋아하고 그들과 소통이 되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기를 목마른 사슴같이 갈망하는데, 나는 꼰대가 되지 않도록 마음의 기도를 하다니. 이런 쓰잘데기 없는 일에 에너지를 쏟아붓는 남자가 되어가는 게 한심스러웠다. 내가 제대로 된 길을 가는 건 맞는가? TV다큐에서 본 것처럼.. 사냥용 말고기 먹이를 잔뜩 먹어치운 콘도르, 그리하여 안데스 산봉우리 사이로 고고하게 상승기류가 흐름에도 불구하고 몸이 무거워져 사냥꾼에게 생포되고 마는 콘도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아직 나는 저 넓은 들판으로 훠어이 훠어이 날아, 기류를 타고 피안의 언덕배기까지 건너가야 할 임무가 남아 있으니까...
둘째는 잠자리로 들어가고 내 마음은 한 마리 콘도르가 되어 청청한 하늘 높이 떠올라 사위를 살피며 미끄러져 간다.. 시월 중순의 금요일, 콘도르는 조신하게 헬스만 하였을 뿐이다. 욕심은 기름기와 같아서 콘도르가 상승기류에 올라타는 것을 막는 말고기와 같다. 나는 욕심으로 비대해진 콘도르가 되지 않으려 안간힘 쓰며 김상욱과 김영하와 유시민이 너스레 떨었던 토스카나 대자연의 청청한 하늘, 지상에 머무르는 동안 가고 싶어 했던 그 창공으로 깊숙이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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