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Daughter

그녀와 나 사이에 '희망'이란?

hittite23 2025. 3. 28.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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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a Young Woman / Auguste Renoir作

 

 


지금 하는 이야기의 시작은 201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당시 철강회사 생산공장의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었다. 지방 해안도시인지라 나홀로 직장이 위치한 그 도시에서 주중이면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기숙 겸 아파트와 공장을 왔다리갔다리 하며 생활하고, 주말이면 가족이 있는 서울로 씽씽 왕래하는 처지였다.

그럼 가족 구성원은?

 

나에게 가족이라고 해봤자 연로하신 어머니와 성인이 된 두 딸이 전부다. 아이 엄마는 사고로 세상을 떠난지 몇 해던가.. 암튼, 나는 주말이면 서울 집으로 올라와서 어머니와 딸을 보고 다시 지방도시로 내려가 직장 생활하는 삶의 쳇바퀴를 타는 다람쥐였다. 다람쥐는 한해, 두 해를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반복해서 굴러먹어도 불평이나 새로운 모색을 할 생각이 없는 존재다. 그런 나에게 제일 큰 관심사는 무엇일까. 아, 이 대목에선 나의 진심이 얼마나 글발에 반영되는지 장담할 수 없는데... 말하자면

 

1순위는 자식이다.

2순위는 생길지 말지 알 수 없는 여성 동지 혹은 옆지기 구하는 일이다. 그리고

3순위가 어머니 케어해드리는 것.

이 정도로 말하면 거의 진심을 털어놓은 수준 아닌가?

 

나는 그렇게 말하지만 혹자는 1순위와 2순위를 바꿔치기한다고 지적질할 수도 있겠다. 그건 충분히 개연성 있는 얘기이므로 반박은 안 하겠다. 그래도 나의 심정은 위에서 말한 그대로다.

 

내가 언급한 지방 도시는 D시다. 그곳 공장에서 열나게 일하는 중에 카톡이 왔다. 둘째였다. 2명의 딸과 엄니를 포함해서 나에게 카톡 보내는 빈도가 가장 높은 존재이다. 어머니가 가끔 보내시고.. 큰 딸은 가뭄에 콩 나듯 보내오고.. 그렇다면 좋든 싫든 애인도 여친도 없는 나에게 둘째는 삶을 동반하는 존재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둘째가 보내오는 카톡은 나에게 경끼를 일으키게 할 때가 많았다. 원인제공자가 나인지 아니면 딸 녀석인지 어느 쪽에 있는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면 우리는 서로 가족이므로. 그럼 경끼를 일으키는 원인은 찾아볼 만하다. 아마도 그건 내가 새가슴이기 때문이리라.

 

오늘 둘째는 편의점 알바 하다가 평소 빈혈끼가 있던 차에 조치를 안 취한 탓인지 힘들어서 조퇴를 하였다는 카톡을 보내왔다. 빈혈끼가 있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 얘기였다. 나는 또 한 번 가슴이 철렁이는 걸 느낀다. 하루 7시간 일하고 월급 120 만원 정도 받는 알바 일자리를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는지 불안하기 그지없다. 한 달 월급 받고 이제 두 달째 접어들었는데 한 달을 채우기도 전에 휴가를 하루 썼고, 휴가 쓴 지 며칠 되지 않아 동료의 대근으로 또 하루를 쉬고.. 나는 주 5일 근무하면서 그렇게 휴가 쓰는 알바가 있을까 싶고, 내가 사장이라면 결코 좋은 시선을 보내지 않을 것 같아 둘째의 알바자리가 불안 불안했었다. 그런데 이번엔 조퇴란다.

 

나는 그렇지만 둘째에게 잔소리 한 마디 못했다. 잔소리는 절대 금기인 것이 오히려 사태를 악화시켜 손쓸 방도가 없는 지경으로 내달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조신하게 문자로 약은 사 먹었냐고 물어보았을 뿐이다.

 

둘째의 사고방식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내 생각으로 둘째를 대하면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걸 알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삭히면서 참고 또 참는다. 내가 참음으로써 둘째가 알바일이나마 중단하지 않고 계속한다면 그래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거 아닌가. 단 한 푼이라도 규칙적으로 벌어들이는 삶을 살 수 있다면 그건 가느다란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는 일이다. 삶이란 하루 남는 장사를 하면 계속 좋아지겠지만 하루 까먹는 장사를 하면 남는 게 없고 더 나쁜 상황으로 내몰릴 수 있는 것이니까. 즉 한 푼이라도 남는 장사를 하면 희망이 있지만 한 푼이라도 까먹는 장사를 하면 그건 절망인 인생이 된다. 아주 간단한 이치요, 논리다. 나는 그걸 둘째에게 설파하고 머리에 주입시키고 싶은 욕망이 굴뚝같지만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다. 내가 아는 걸 딸이 같은 논리와 감정으로 알아들으면 좋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나는 이처럼 내면으로 속물근성을 가지고 있는 작자라서, 둘째의 문자 한 통에 기분이 업 되기도 하고 사정없이 다운되기도 한다. 내일 집에 들어갔을 때 둘째가 알바중단 얘기를 꺼내지나 않을는지 아마 내 무의식은 그걸 걱정하는 모양이다. 내 속사람이 어떤 생각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만은 내 속사람이 속이지 않는다. 속사람이 내 마음을 형성하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 십수 년을 연구해봐도 아직 완전히 알아내지 못했다. 한 가지 알아낸 것이 있다면 그건 내 속사람이 나(겉사람)를 속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일단 내 마음은 둘째가 스스로 앞가림을 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라지만, 둘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정체를 찾지 못해 답답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좀 더 선명하게 둘째 마음 바라볼 수 있기를 희망하는 마음 가득이다. 아, 젠장 마음과 마음을 연이어 기술하니 헷갈린다. 어쨌거나 나는 잘 안다. 비록 둘째의 마음을 알아낸다 해도 둘째의 마음을 인도할 힘이 나에게 없음을... 그러므로 내가 소 뒷걸음질 치다 쥐 잡듯 둘째의 마음에 도달하여도 나는 그것에다가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둘째가 나에게 사소한 일이나 시시콜콜한 일상을 얘기한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욕심이 많아서 내가 바라는 바를 투시하고 또 투시한다. 그건 결코 현명하지 않은 일이다. 나는 이미 꼰대가 되어버린 것일까? 자기 생각이 고착되어 타인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나이 먹은 남자를 가리켜 꼰대라 하는 거라면 나는 진짜 꼰대임이 틀림없다. 시월이라는 계절도 꼰대가 되어가는지 추위가 고착되어 물러가지 않고 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시월이 깊어가며 점점 날이 추워져 간다는 뜻이다. 날이 추워지면 마음도 추워질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신경이 쓰인다.

과연..

나와 둘째의 앞날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Young Girl with Hat (Jeune fille au chapeau), c. 1893 / Auguste Renoir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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